된장녀·알파걸·여초현상 등 20대 여성을 지칭하는 신조어가 무성하다. 각종 매체와 전문가들은 “21세기는 여성의 시대”라며 ‘여풍’을 선전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토익·자격증·인턴·봉사활동·어학연수·성형의 과정을 거쳐야 겨우 취업하는 ‘스펙 6종 잉여세대’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한국여성노동자회가 20대 여성노동자들의 노동과 생활 실태를 지난달 30일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노동계가 20대 여성노동자를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벌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사 결과 20대 여성들은 노동시장에서 이른바 ‘마이너리티’였다. 그들은 낙오자가 될까 불안해하며 끝없이 노동시장을 표류하고 있었다. 젊은 여성 엘리트를 뜻하는 ‘알파걸’도 예외는 아니었다. <매일노동뉴스>가 ‘여학생’에서 ‘여성노동자’가 돼 가는 20대 여성들의 행로를 더듬었다.
 
연봉 ‘맷값 21대’면 OK
 
20대 여성들을 포장하는 신조어들은 주로 ‘높은 콧대’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20~30대 여성 둘 중 하나는 연봉 2천100만원 이하 일자리라도 취업할 의사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여성노동자회가 올해 8월부터 10월까지 서울 등 7개 지역에서 18~33세 미혼여성 중 아르바이트 경험이 있는 대학생과 대학원생 664명·구직자 252명·취업자 401명(1천31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다.

올해 4년제 대졸 신입사원의 평균 초임 연봉이 대기업 2천700만원, 중소기업 2천400만원인 것을 감안하면 젊은 여성 구직자의 눈높이가 높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한 재벌 2세가 화물 노동자를 폭행하며 맷값으로 한 대당 100만원을 줬다는 내용이 알려지자, 20대 여성노동자들 사이에서 ‘희망 연봉이 맷값 21대’라는 자조도 나왔다.
 
‘여학생’과 ‘여성노동자’의 사이   
 
경기도 한 대학의 행정학과를 졸업한 이혜원(가명·27)씨. 그도 한때는 여느 대학생처럼 ‘공시족’이었다. 2006년 대학 졸업 후 2년간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전공을 살려 정년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일을 하고 싶었어요. 비정규직으로 전전하는 미래가 뻔하잖아요. 공무원은 지구상에서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인 것 같았죠.”

그러나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해가 거듭될수록 수험생은 늘었고 채용인원은 줄었다. 2년간 공시족 생활을 접고 취업에 도전했다. 여러 곳에 이력서를 냈다. 그러나 한 곳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씨는 일단 돈부터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학교 선배 추천으로 보험회사 사무직으로 취업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 영업직이었다. 영업이 적성에 맞지 않았던 그는 3개월 만에 그만뒀다. 이후 여러 중소기업에서 사무보조일을 하며 떠돌았다.
“비록 계약직이었지만 일이 끝나고 나면 공무원 시험 준비를 병행할 수 있을 거라는 목표와 꿈이 있었어요.”

그러던 중 이씨는 한 회사에서 프로젝트가 잘되면 정규직으로 채용하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그때부터 희망고문이 시작됐다. 출근시간은 오전 9시로 정해져 있었지만, 퇴근시간은 밤 11시와 새벽 4시 사이를 오갔다. 그렇게 일하는 사이 공무원 시험 준비는 뒷전이 됐다. 결과는 계약해지였다. 경기침체가 이유라고 했다.  

“제가 조금 더 열심히 하면 정말 정규직이 될 줄 알았습니다. 일만 했어요. 그게 부당한 줄도 몰랐어요. 회사가 원래 이런 곳이라고 생각하며 힘들게 버텼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부려먹으려고 떡밥을 던진 거였어요.”

이씨는 여성노동자가 남성노동자와 다른 존재라는 것도 경험했다. 그토록 되고 싶었던 정규직 여성의 미래도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정규직도 여성은 잘리더라구요. 한 여성 정규직이 임신을 했는데, 축하는커녕 회사의 짐인 것처럼 눈치를 줍니다. 결국 잘렸어요. 저 혼자 여성 직원으로 남게 됐는데 미래도 안 보이고 고민을 얘기할 곳도 없어 혼란스러웠어요.”
 
‘알파우먼’이 되지 못하는 ‘알파걸’
 
취업에 성공한 ‘알파걸’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국내 명문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석사를 마친 김수정(30·가명)씨가 목격한 알파걸의 다음 단계는 ‘알파우먼’이 아니었다. 악착같은 ‘슈퍼우먼’이 되거나 아니면 ‘퇴출’이었다. 김씨는 광고를 전공한 경력을 살려 국내 한 공기업의 마케팅부서에서 5년간 일했다. 하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여성노동자와 남성노동자는 다른 존재였다.

“제도적으로는 남녀가 다 같아요. 근데 하는 일을 보면 주 업무는 남자가 합니다. 선배들도 우리를 그냥 여자애 대하듯 해요. 상사들이 이너서클을 만들어 함께 몰려다니는데, 모두 남자들이에요. 저희는 영원한 주변인일 뿐입니다.”
사내 성희롱 문화도 김씨를 힘들게 했다. 김씨는 “상사들이 일상적으로 저에게 어떤 속옷을 입고 있는지 물었고, 회식을 할 때는 임원진 옆에 항상 가장 어린 여성 직원들이 앉아 술시중을 들어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노조를 통해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지만 너무 멀게 느껴졌어요. 여성 선배들에게 상의를 하니 ‘난 더 심한 모욕도 견뎠으니 참으라’는 말만 했어요. 참다 못해 문제를 제기했더니 ‘되바라진 아이’라고 손가락질하더군요. 그러니까 혹시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의심하게 되더라고요. 정신분열증까지 생겼습니다.”

김씨는 조직에서 비전을 찾기 힘들었다고 했다. 회사 지시에 따라 광고와는 무관한 부서를 전전하는 바람에 전문가로서 경력을 쌓을 기회도 없었다.
“당시 38살 여성 차장님이 있었는데, 그분 사는 모습을 보고 끔찍했어요. 아이 돌보느라 슈퍼우먼처럼 정말 악착같이 사는데 동년배 남성 선배들에 비해 항상 인정을 못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김씨는 한 회사만의 문제인가 싶어 이직을 위해 여러 곳을 알아봤다. 그런데 다른 회사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다르지 않았다. 결국 김씨는 직업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그는 “5년간의 사회생활을 통해 느낀 건 남성 중심의 현 조직문화에서는 제 아무리 여성이 발버둥쳐도 일한 만큼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20대 남성과 여성노동자의 차이
 
동년배인 20대 남성이 보기에도 국내 조직문화와 20대 여성노동자가 접점을 찾는 건 어려워 보였다. 한 대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는 20대 남성 박아무개(29)씨는 풍운의 꿈을 꾸고 있다. 영업직에서 일한다는 박씨는 “회사에서 내가 일한 만큼 인정받고 보상받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김씨와는 상반된 반응이었다.

그는 “회식을 해도 남성은 99%가 참석하지만 여성은 여러 가지 이유로 70% 정도만 참석하는 등 남녀가 조직에 적응하는 모습이 다르다”며 “남자들은 회사 내 조직문화가 군대문화와 다를 바 없어 익숙하지만, 여성 동기들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해 낯설어한다”고 말했다. 박씨는 이어 “남성 임원들은 일과 가정을 동시에 꾸리면서 살지만 여성 임원들은 진급 속도가 느린 만큼 결혼을 포기하고 주말도 없이 헌신해야 한다”며 “그러한 여성 임원들의 모습을 보면서 암울해하는 여성 동기들이 적지 않다”고 귀띔했다.
 
성별에 따른 임금도 차이가 났다. 지난해 고용노동부 통계를 보면 전 연령과 사업체 규모에 상관없이 남성의 임금이 모두 높았다. 남성 정규직 임금을 100으로 가정하면 여성정규직은 66.8, 남성비정규직은 48.4, 여성비정규직은 38.7이었다. 학교를 벗어나면서부터 남성과 여성은 출발점부터 달라진다.
 
20대 여성노동자 문제 은폐
 
이번 조사를 실시한 여명희 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성별·직종 직무분리와 임금격차, 성차별적 조직문화 등 여성노동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며 “88만원 세대라는 거대 담론 속에서 20대 여성은 세대 간, 성별 간 경쟁에서 이중으로 소외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여초현상과 같은 보도가 노동시장 성차별 문제를 은폐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며 “20대 여성들도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20대 여성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대부분이 자신의 경쟁력을 높이는 개인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풀고 있다. ‘고립’에 빠질 위험이 높다. 20대 여성의 고립은 경력단절로 이어져 사회적으로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사표를 낼 때 ‘역시 여자는 애사심이 없고 책임감이 없다’는 말을 들었는데, 저로 인해 여성 직원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고착화된 것은 아닌지 다른 여성 직원들에게 미안했어요. 근데 함께 목소리를 내주는 곳이 없었어요. ‘내 문제가 아니다’거나 ‘사회가 원래 그러니 저 하나만 달라지면 된다’고 하더라구요.”

김씨는 연대의 경험이 한 번도 없는 20대 여성에게 함께 목소리를 내라고 하는 건 무리한 요구라고 했다. 김씨는 “연대를 하려면 최소한 자신의 권리가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며 “워낙 일 자체가 없다 보니 권리는 고사하고 그저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아쉬워했다.

4년 새 자살 2배 증가 … 20대 여성 고통지수 가장 높아
 
이들의 팍팍한 삶은 유례없는 자살률로 유추해 볼 수 있다. 경찰청 ‘2004~2008년 자살자 현황’에 따르면 전체 자살자수는 2004년부터 2008년까지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며 정체돼 있다. 하지만 20대 여성 자살자수 증가는 두드러졌다. 2004년 자살자수는 남성이 746명, 여성이 415명이었다.

그러나 2008년에는 남성 772명, 여성 802명으로 역전됐다. 여성 자살자수가 남성 자살자수를 처음으로 넘어선 것이다. 세계적으로 자살은 모든 연령대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2배 정도 많은 것이 일반적이다. 육체적·심리적 특성상 치명적인 방법으로 자살을 하는 빈도가 여성보다 남성이 높기 때문이다. 경찰청은 “우리나라 20대의 경우 유독 여성 자살자가 남성보다 많아진 것으로 예전에는 볼 수 없던 현상”이라고 밝혔다. 한국정책과학연구원(KPSI)이 9월 실시한 ‘여성의식 조사’에서도 20대 여성의 고통지수가 5.14점으로 각 연령대 중 가장 높아 눈길을 끌었다.

김신혜정 여성노동자회 교육부장은 “사회적 관심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그는 “20대 여성노동자의 좌절은 사회와 회사, 20대 여성 모두에게 피해를 준다”며 “이 간극을 줄이려면 조직과 사회가 그들이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신혜정(28·사진) 한국여성노동자회 교육부장은 ‘청년층 여성들의 노동과 삶‘ 실태조사를 기획한 장본인이다.
그는 지난 23일 <매일노동뉴스>와 만나 “대한민국에 20대 여성노동자들도 살고 있다는 것을 사회에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저출산의 주범, 조직부적응자, 이기주의자…. 요즘 사회는 20대 여성들에게 낙인을 찍느라 바쁘다. 88만원 세대에는 공감하면서도 그 속의 20대 여성노동자들이 사회에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언론은 틈만 나면 여성상위시대라고 선전합니다. 20대 여성노동자들이 일을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어요.”
김씨도 스스로 경험하기 전까지는 몰랐다고 했다. 그도 한 대기업에서 일한 적이 있다. 회식에서 남자 직원들 틈에 않아 고기쌈을 싸서 먹여 줘야 했다. 임신한 선배를  해고하고, 그 선배를 또 같은 업무에 계약직으로 재고용해 임금을 반으로 줄여 같은 일을 시키는 것을 보면서 경악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노동시장의 성차별 문제를 얘기하는 건 촌스러운 건 줄 알았습니다. 책에나 나오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겪어 보니 임신한 선배가 꼭 제 미래일 것만 같았어요.”
김씨는 곧바로 사표를 던지고 여성노동자회에 둥지를 틀었다. 청년여성노동자 실태조사를 하면서 당사자들이 20대 여성들이 자신의 권리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60.2%가 4대 보험이 뭔지도 몰랐어요. 권리를 모르니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참을 수밖에 없는 거죠. 조직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게 어려운 이유이기도 해요.”
김씨는 “성장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차별이란 것을 경험해 보지 못한 청년층 여성들이 노동시장에서 난생 처음 겪는 성차별과 불안정한 노동문제로 인해 혼자 불안해하고 있다”며 “20대 여성들의 노동현실에 대한 사회적 조명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김은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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