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임

녹색병원·노동환경건강연구소 연구원

며칠 전 아이가 학교에서 설문조사지를 가져왔다. ‘학생인권조례’를 만들기 위한 사전 조사활동의 일환이기 때문에 학부모의 응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진보 교육감’이 있는 우리 동네만의 얘기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러나 첫 질문에 응답하려는 순간 눈살이 찌푸려졌다. ‘학교의 품위를 손상케 하는 행동’이라는 표현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한 여러 상황을 나열하면서 그 각각에 규제가 필요한지 아닌지 의견을 묻고 있었다. 두 가지는 확실했다. 하나는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책임자는 학생인권조례에 반대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여전히 무생물체인 조직이 인간보다 더 위대하게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학교는 학생을 위해 존재하는 그릇일 뿐입니다. 따라서 학교에 품위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학교를 위해 아이들이 뭔가를 규제당해야 한다는 것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라고 응답했다.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런 상황을 접하면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개최를 앞두고 ‘국격’ 운운했던 자들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이 결코 어이없음이 아니라 여전히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국가는 국민을 담는 그릇일 뿐, 국민이 없으면 국가라는 형식도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이 과도한가. 차라리 국격이라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국격은 어느 수준일까. 이것과 비슷한 개념이 또 있다. 바로 ‘선진국’이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인가. 중진국인가. 개발도상국인가. 실제로 분명하지 않다. 경제규모로 보면 선진국이 틀림없다. 이 작은 남한의 경제규모가 세계 11위인 적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이코노미스트의 계열사인 EIU가 조사한 삶의 질 조사에서는 우리나라가 30위로 나타났다. 높은 경제력 순위를 현저히 감소시키는 사유들은 무엇인가. 1위를 달리는 창피한 요인들 때문이다. 자살률·산재사망률·사교육비 지출률·보장성이 너무나 낮은 사회복지 수준과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각종 노동 관련 악법들 탓에 발생하는 사회갈등이 그것이다.

산업재해통계만 봐도 그렇다. 한 연구에서 전 세계의 직업성 사망원인 우선순위를 분석한 결과 1순위가 압도적으로 암(32%)이었다. 2순위가 순환계 질환(26%), 3순위가 업무 중 사고(17%)였다.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1순위가 압도적으로 업무 중 사고(전체 산업재해 중 90%)다. 그 다음이 질병으로 10%를 차지한다. 질병 중에서 가장 사망률이 높은 것은 진폐와 뇌심혈관계질환이다. 이 둘은 비중이 비슷하다.

우리나라에서 직업성 암이라는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야 비율로 계산이 안 될 정도다. 연간 20여건에 불과하다. 다른 나라 노동자들은 사고로 사망하는 비율이 매우 낮다. 우리는 65%가 사고로 사망한다. 매우 기형적이고 이상한 산재통계다.

이상을 정리하면 우리는 여전히 안전사고를 막지 않는 나라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서 가장 많이 드러나는 직업성 암을 찾지 않거나 찾기 싫은 나라다. 이것들이 한국의 국격을 실추시키는 진짜 원인이다. 이러한 문제를 문제라고 지적하면 정부는 전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투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또 사회 갈등비용이 발생하고 국격이 실추된다.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국격을 얘기하지 말자. 아니, 해도 좋다. 그런데 정말 국격을 얘기하려면 오로지 성장과 발전이라 불리는 ‘돈’만이 목적이자 수단이 되는 천박한 자본주의를 만들려고 하는 정부의 국정운영 기조가 국격을 높이는 행위인지 자신 있게 드러내 놓고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 올해는 용해로에 빠져 사망한 청년노동자도 있었다. 4대강 사업으로 더 많은 건설 노동자들의 숨이 멎고 있다. 이런 상황을 바꾸지 못할 거라면 정부는 스스로 숨을 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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