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5명을 키우다 보니 때를 놓쳤어요. 열심히 살아서 복 받았나 봐요. 저에게도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결혼생활 24년 만에 처음으로 웨딩드레스를 입은 서옥순(45)씨는 연신 눈물을 글썽였다. 결혼 후 남편과 단둘이 떠나는 여행도 이번이 처음이다. 신랑 강명호(47)씨는 용접을 하는 건설노동자다. 강씨는 환하게 웃으면서 “웨딩드레스 입은 와이프도 신혼여행도 꿈만 같다”는 말을 반복했다.

강명호-서옥순씨 부부처럼 개인 사정으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사는 건설노동자 부부 26쌍이 19일 합동결혼식을 올렸다. 플랜트건설노조 전남동부·경남서부지부가 이날 정오 전남 광양시 광양읍 체육관에서 '행복한 가정 만들기 합동결혼식'을 주최해 준 덕분이다.

지부는 “건설현장에서 고생하는 조합원의 노고에 보답하고, 개인적 사정으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이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추억을 마련해 주기 위해 행사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지부는 지난 10월 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달간 결혼신청서를 접수한 결과 26쌍의 부부가 신청했다. 그중 6쌍은 다문화 가정이었다. 지부는 이들에게 결혼식과 신혼여행·피로연까지 모두 무료로 제공했다. <매일노동뉴스>가 이날 행사장을 찾아 이들 부부의 사연을 기록했다.


“늦은 결혼에 가족들이 가장 행복”

"이 좋은 날 울긴 왜 울어. 앞으로 살 날만 생각하자."
신부 대기실에 있던 서옥순씨가 눈물을 훔치자 주변 친구들이 그를 달랬다. 서씨는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을 넷째 딸에게 보여 주지 못해 안타깝다고 했다. 넷째 딸은 올해 8월 물놀이 도중 사고를 당해 서씨의 가슴 속에 묻어야 했다. 신랑 강명호씨는 "딸을 잃고 온 가족이 힘들었는데 특히 아내가 가장 많이 고통스러워했다"며 "이번 기회를 통해 아내에게 고마운 것도 갚고 아내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 싶었다"고 전했다.

늦은 결혼을 가장 축하한 사람은 가족들이었다. 강명호-서옥순씨 부부의 큰딸인 강은미(23)씨는 "평생 서로 위하며 사는 모습을 통해 부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우고 있다"며 "가족이 못 챙겨 준 결혼식을 선물해 준 노조에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고 말했다.
이날 결혼한 부부들은 초혼·재혼·국제결혼 등 저마다 사연이 다양했다. 신랑의 평균나이는 45세, 신부의 평균 나이는 35세였다. 지부에 따르면 현재 개인 사정으로 결혼식을 못하고 사는 부부가 100여쌍에 이른다. 김재우 지부장은 "장시간 노동과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불안정한 노동, 천대하는 사회적 분위기 등으로 인해 혼기를 놓치거나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사는 건설노동자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베트남 신부와 지난 5월부터 함께 살고 있는 박효석(44)씨는 신부 자랑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박씨는 "아내와 함께 산 뒤로 노모의 건강도 좋아지고 아내가 2세까지 임신해 매일 아내를 업고 다니고 싶은 심정"이라고 신부를 치켜세웠다.

재혼을 앞둔 부부들은 대체로 덤덤했지만 시댁걱정도 털어놓았다. 남편과 사별하고 재혼을 앞둔 장선희(51)씨는 “친구들은 드레스 두 번 입는다고 좋아하지만, 정작 맏며느리로서 해야 될 역할을 잘해 낼 수 있을지 걱정돼 밤에 잠이 안 온다”고 말했다.

최고령 신랑 곽태준(56)씨는 건설노동자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여러 번 반복했다. 곽씨는 “정부가 해 줘야 할 일을 노조가 하고 있다"며 "건설노동자들도 인간답게 남들처럼 결혼식을 미루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하루 8시간 노동 정착을 위한 정부의 관리·감독이 절실하다"고 주문했다.


“정부, 건설노동자 복지에 관심 가져야”

이날 행사장에는 지역 노사정을 대표하는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결혼식 중간에는 엄마, 아빠를 부르며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잇따라 실수를 남발하는 부부들로 인해 하객들의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박노신 민주당 광양시의원은 "결혼한 지 38년이 됐지만 인생만큼 결혼생활도 만만치 않다"며 "결혼을 통해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 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강팔문 건설근로자공제회 이사장은 "세상에 사랑보다 더 좋은 건 없다"며 "건설공제회가 건설노동자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힘을 보태겠다"고 강조했다.

26쌍의 신랑을 대표해 정용국씨는 "그간 지내 온 시간보다 앞으로 함께할 시간 동안 더 많이 사랑하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결혼식을 마친 부부는 3박4일간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지부가 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광양전문건설인협회·포스코건설·전남동부 산업안전보건공단·건설근로자공제회 등 여러 노사정 단체들이 십시일반으로 후원금을 모았다.

이날 결혼식은 정기환 부산MBC 아나운서의 사회로 진행됐으며, 결혼식 주례는 없었다. 행사에는 남궁현 건설산업연맹 위원장·백석근 건설산업연맹 산별추진위원장·윤갑인재 플랜트건설노조 위원장·김준식 광양제철소장·박상욱 광양상공회의소 등 1천500여명이 함께했다.

김재우 플랜트건설노조 전남동부·경남서부지부 지부장(49·사진)은 19일 합동결혼식장에서 가장 분주했다. 신랑측 26명을 대표해 하객들에게 감사인사를 했고, 가장 많은 축하 인사를 받았다.
"지부 설립 후 9년 동안 조합원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많은 성장을 했습니다. 그간의 성과를 조합원들에게 반드시 돌려주고 싶었습니다."
김재우 지부장은 합동결혼식이 노조의 부정적 이미지를 좋게 바꾸는 데 도움이 됐다고 귀띔했다.
"오히려 아들이 장가를 가니 지역주민인 가족들이 더 행복해합니다. 민주노총 노조라서 험악하게 싸우는 조직인 줄로만 알았는데, 자기들이 못하는 역할을 대신해 큰일을 해 줬다고 고맙다는 말을 듣기도 했어요."
사업주의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김 지부장은 "비록 행사를 같이 주최하지는 못했지만, 사업주들도 십시일반 행사비를 후원했다"고 말했다. 이어 "건설근로자공제회와 내년부터 매년 이 사업을 함께 개최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내년부터는 지역주민과 함께할 사업을 해 볼 생각이라고 했다.
김 지부장은 특히 "정부가 건설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당부했다.
"오늘 행사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번 합동결혼식은 건설노동자 삶의 질과 복지 향상을 위한 사회적 관심을 유발시키는 계기가 돼야 합니다. 노조 혼자서는 안 됩니다. 이제 노사정 모두가 건설노동자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정부가 이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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