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폭발했다. 방글라데시 치타공에서 노동자들은 분노했다. 지난 11일부터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수출산업단지 치타공에서, 수도 다카에서 도로를 점거하고 공장을 습격했다. 4명이 숨지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 노동자들의 분노는 폭력이 됐다. 저임금에 항의하다가 사측의 직장폐쇄에 반발해 거리와 공장에서 격렬하게 시위를 벌였다. 노스페이스를 생산하는 영원무역을 향해, 방글라데시의 모든 사용자들을 향해, 그리고 세계를 향해 시위했다. 그들에겐 공장이 한국 회사의 것이든, 독일 회사의 것이든 관계가 없었다. 세계의 모든 자본을 향해서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은 폭발했다.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아니 아무도 그들을 막을 자가 없었다. 경찰도 그들의 분노를 저지할 수 없었다. 그들은 조직되지 않은 분노를 폭발시켰다. 닥치는 대로 분노했다. 공장과 거리에서, 각목과 벽돌로 분노했다. 관리자와 기자를 가리지 않았다. 그들의 분노를 통제할 노조와 노총은 없었다. 그들은 노조의 통제·관리 아래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의 분노는 노조의 교섭과 협상에 의해 통제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시위는 교섭과 협상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시위는 분노 자체였다. 그들은 분노를 협상을 위한 시위로서 표시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자본과 세계를 향해 그들은 분노했다. 그래서 그들은 세계에 보여 줬다. 아무도 통제하지 않은, 노동자의 순수한 분노가 무엇인지 보여 줬다. 아무도 협상과 절충하지 않은, 노동자의 진솔한 분노가 무엇인지 보여 줬다. 그런 것이었다. 조직되거나 관리되지 않은 노동자의 분노는 본래 그런 것이었다. 조직되거나 관리되지 않은, 피착취자의 분노는 본래 그런 것이었다. 타인에게 자신의 노동의 결과물을 수탈당하는 자의 분노는 그런 것이라고 역사는 기록해 왔다. 자신이 생산하지만 자신은 구입할 수 없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들과 그러한 생산의 시설과 체계에 대해, 그리고 그러한 세상에 대해 파괴와 폭력으로 분노했다. 상품을 불태우고 생산시설을 파괴하고 세상의 질서에 폭동을 벌였다. 그렇게 착취당한 노동은 수천 년을 분노했다. 그리고 다시 오늘 방글라데시 치타공에서 폭발했다.

2. 치타공에서 폭발했지만 울산에서는 폭발하지 않았다. 방글라데시에서 노동자들은 분노했지만 한국에서 노동자들은 분노하지 않았다.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은 자신의 임금수준에 분노하여 폭발했지만 영국·독일·프랑스 그리고 한국 노동자들은 자신의 임금수준에 분노해 폭발하지 않는다. 임금이 높기 때문에 폭발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방글라데시 노동자와 달리 노동자로서 분노하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로서 분노할 수 없기 때문에, 분노로서 시위할 수 없기 때문에 폭발하지 않을 뿐이다. 방글라데시에선 영원무역 공장 노동자의 임금수준은 모든 노동자가 관심을 갖고 분노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치타공과 다카에서 모든 노동자들은 함께 분노했다. 자신의 문제로 분노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선 현대자동차 노동자의 임금수준은 현대자동차 노동자의 문제일 뿐이다. 다른 사업장 노동자들은 함께 분노하지 않는다. 그리고 방글라데시에선 노동자들이 분노하지 않도록 관리·통제하는 노동자조직은 없었다. 금속노조도, 노총도 노동자들의 분노를 통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에선 노동자의 분노는 노조에 의해 통제되고 조절된다. 노동자의 분노는 노동자조직에 의해 통제되고 조절되고 있다. 영국·독일·프랑스에서도 그렇다. 그래서 영국·독일·프랑스는 폭발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 노동자는 분노하지도, 분노할 수도 없다.

3. 최저임금, 근로기준법 개정, 비정규직법 개정 등 노동조건과 노동법 등의 문제가 발생하면 그들이 분노하면 그만이다. 노조와 노총이 성명서를 발표하고 집회를 조직해 분노하면 그만이다. 그렇다. 그들은 분노하지만 노동자는 분노하지 않는다. 노조와 노총은 분노하지만 조합원은 분노하지 않는다. 분노할 자는 조직됐고 조직된 자는 조직이 분노하면 자신은 분노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그렇게 조직되고 운영된다. 노동자조직은 설립되는 순간 조직의 관리·운영이 자기 목적이 된다. 그래서 지도집행력을 말하며 조직관리자에게 권한을 집중할 방법을 모색하고 그 방법에 따라 질서를 구축한다. 그리고 노동자의 분노는 조직이 관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분노는 조직이 하는 것일 뿐 노동자는 스스로 분노할 수도 분노하지도 않게 된다. 사용자를 상대로 시위하고 행동하는 것 일체는 노조 등 노동자조직이 통제하고 관리하는 범위 내에서 수행되게 된다. 노조가 아닌, 노동자정당에서도 다를 게 없다. 조직은 조직 자체가 목적이 되고 이를 위해 그 구성원은 조직의 결정에 따라서 분노해야 한다. 그렇게 자본주의 세상에서 노동자는 살아온 것이 아닐까. 노조 등 노동자조직에 의해 자신의 분노가 통제·관리되고 그래서 급기야는 분노도 잊어버린 채 살아온 것이 아닐까. 그렇다. 그렇게 150년을 살아왔다. 노동자의 분노를 노동자조직의 것으로 하기 위해 노조·노동자정당 등 노동자조직을 조직하고 이를 확대 강화하기 위해 노동자는 살아 왔다. 총파업, 혁명과 전쟁을 거쳐 노동자는 이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왔다. 공장에서 노동자는 작업장의 자동기계였으므로 노동자조직에서도 노동자는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집단적 규율과 통제에 따라 조직의 결정과 지시에 의해 행동해야 했다. 그것이 노동자라고 했다. 그래서 노동자세상은 그런 세상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노동자는 분노하고 싶어도 분노할 수 없었다. 조직이 결정하고 지시한 것이 아니므로 노동자는 분노해서는 안 됐다. 그렇게 자본주의 세상에서 노조와 노동자정당을 조직하고 운영했다. 혹은 자본이 없는 세상에서도 그렇게 노동자조직을 조직하고 운영했다. 그리고 급기야 노동자의 분노조차도 조절됐고, 마침내 노동자는 분노하지도 분노할 수도 없게 됐다. 오늘 영국과 독일의 노동자는 분노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분노는 조직된 노동자가 아닌 자의 몫일 뿐이다. 그래서 가끔 실업자나 학생들이 폭발할 뿐이다. 그리고 노조와 노동자정당에서 의해 조직되고 계획된 분노만이, 노동자조직의 분노만이 있을 뿐이다.

4. 그러나 분노가 없으면 변화도 없다. 노동하는 자가 노동의 결과물을 빼앗기는 데 대해 분노하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고 역사는 말해 왔다. 이 세상에선 노동하는 자의 분노에 의해 다른 세상을 열 수 있었다고 역사는 말해 왔다. 노동하는 자가 분노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변할 수 없다. 아무리 세상이 달라진다 해도 노동자에겐 내일도 여전히 오늘일 뿐이다. 노동자의 분노가 방글라데시 치타공에서처럼 파괴와 폭력으로 폭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얼마든지 평화적인 파업, 시위와 집회로 폭발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노동자의 분노로서 폭발돼야 한다. 어떠한 것도 노동자의 분노가 노동자조직의 분노로 대체돼서는 안 된다. 노동자의 분노는 어떠한 계기에 의해서 어떠한 순간에 폭발할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이를 노동자조직이 관리하게 되면 노동자는 분노할 수 없다. 이를 노동자조직이 관리하게 되면 조직이 노동자를 관리하게 되고 급기야 노동자는 조직관리자의 지시에 복종하는 자로 전락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노동자조직 관리자의 의사가 노동자의 의사로 갈음하다가 급기야 관리자가 노동자를 갈음하게 된다. 처음에는 관리자는 노동자의 이름으로 지배하다가 나중에는 스스로의 이름으로 지배한다. 이처럼 노동자 전체를 갈음하게 되는 노동자조직의 관리자는 선출되자마자 노동자의 지배자로 되고 만다. 지금까지 노동운동의 역사는 이것들을 보여 줬다. 노동자조직의 관리자가 노동자들을 관리하고 지배하며 노동자의 위에서 군림하는 것을 보여 줬다. 노동자들이 관리자를 선출했다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사람이 지배하는 세상, 1인이나 소수가 아닌 모든 노동자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꾼다면 노동자들은 노동자조직의 관리자의 의사가 노동자 자신들의 의사로 대체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조직은 노동자의 의사에 의해 일상적으로 결정하고 집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노동자들의 분노가 살아 있도록 해야 한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분노하고 폭발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노동운동은 방글라데시의 폭발을 통제하고자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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