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3일째다. 현대자동차에서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한 지 오늘로 23일째다. 사내하청업체가 아닌 현대자동차를 위해 노동하므로 현대자동차가 사용자로서 교섭에 응하라는 것이 이번 파업의 요구다. 노동자를 사용하는 자가 사용자로서 법적 책임을 지라는 것이 이번 파업의 요구다. 이처럼 요구는 단순하다. 노동자를 사용해 자신의 사업을 수행하는 자는 사용자로서 노동법상 책임을 져야 한다. 이처럼 이번 파업의 요구는 당연하다. 그럼에도 현실은 단순하지 않았다. 사용자가 아니라며 현대자동차는 단체교섭을 거부했다. 노동부와 노동위원회는 사내하청업체가 사용자라며 현대자동차를 상대로 한 단체교섭은 인정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현대자동차는 교섭이 아닌 협의만 할 수 있다는 것이라며 복잡하게 협의창구를 제안했다. 그리고 현대자동차는 사용자로서 노동법상 책임을 당연하게 인정하지 않았다. 현대자동차는 사내하청업체와 도급계약을 체결했고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그 사내하청업체와 근로계약을 체결한 것이므로 사용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계약자유의 원칙에 따라 얼마든지 이와 같은 도급계약과 근로계약의 체결이 가능한 것이고 따라서 그 계약의 내용에 따라, 현대자동차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이용해 자동차생산사업을 수행함에도, 사용자로서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노동부와 검찰은 현대자동차의 주장을 인정했다. 법원도 한동안 현대자동차의 주장을 인정했다가 근래 들어 파견근로라고 판결했다. 이상과 같이 이번 파업의 요구는 단순하고 당연한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파업은 불법으로 내몰렸다. 폭력으로 짓밟혔다. 노동자들은 점거농성으로 내몰렸다. 이처럼 2010년 12월 대한민국의 노동자는 불법으로 짓밟히고 있다.

2. 우리는 말해왔다. ‘우리의 세상은 자본주의를 수정한 체제다, 사회적 시장경제와 복지국가가 대한민국헌법의 기본질서이고 기본원리’라고 배웠다. 그래서 노동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이 기본권으로서 당연히 보장된다고 했다(헌법 제33조). 그래서 재산권을 보장하지만 그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할 수 있고 재산권은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행사해야 한다고 했다(헌법 제23조). 헌법은 사회적 기본권들을 국민에게 보장했고(제31조 이하) 국가는 사회보장, 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고 했다(제34조 제2항 참조).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세상은 우리가 열었던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세상, 우리의 체제를 창조한 것은 독일노동자였다. 프랑스와 영국의 노동자였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창조한 세상을 선택했을 뿐이다. 1948년, 우리는 스스로 또는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세상을 선택했다. 이미 우리가 선택할 세상은 정해져 있었다. 이미 그 세상의 질서는 정해져 있었다. 선택을 통해 우리는 선택 이전의 우리와 완전히 단절했다. 이전의 우리의 세상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조선과 식민지조선은 우리가 아니었다. 이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독일과 프랑스, 영국에서 그의 세상이 무엇인지를 배워야했다. 1948년 선택을 통해 그들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가 됐다. 더 이상 우리는 과거의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로 할 수 없게 됐다. 우리가 선택한 세상은 조선과 식민지조선을 계승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조선과 식민지조선의 질서는 사회적 폐습이므로 타파돼야 했다(1948년 헌법전문). 우리가 선택했던 세상의 질서는 우리가 창조했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우리가 선택했던 세상의 질서는 독일과 프랑스, 영국이 창조했던 것이므로 선택 이후 우리는 독일과 프랑스, 영국의 역사에 접합된 세상의 일원으로 살아왔다. 더 이상 우리의 과거는 우리의 역사가 아니었다. 더 이상 우리의 과거 역사는 오늘 우리의 세상의 역사가 아니었다. 오늘 우리의 세상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선택 이전의 우리의 역사를 통해서는 알 수 없게 됐다. 오직 독일과 프랑스, 영국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게 됐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독일과 프랑스, 영국을 들여다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노동자가 불법으로 내몰려 짓밟히고 있는 2010년 12월 오늘 어쩔 수 없이 1918년 독일을 봐야 한다. 1948년 우리가 선택했던 오늘 우리의 세상은 1918년 독일체제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우리의 세상을 열었던 1918년 독일혁명과정에서 노동자평의회를 주장했던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이트를 학살하고 독일노동자들이 세웠던 바이마르공화국을 봐야 한다. 빌헬름 리프크네이트를 계승한 에베르트가 독일노동자들을 조직해서 세웠던 1918년 독일공화국의 헌법은 노동자평의회의 나라가 아니었다. 사업장의 권력은 자본의 것으로 인정했다. 노동자는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사업장은 재산의 크기로 권력이 결정됐고, 노동자의 국가권력은 이를 침범하지 않았다. 사업장평의회는 사업장의 권력이 아니었다. 사업장에서 근로조건에 관한 사항이 아닌 것은 사용자의 것이었고 이는 단지 협의정도만 가능할 뿐이었다. 노동의 조직과 사용은 사용자의 것이었다.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통해서 근로조건을 사용자와 교섭할 뿐이었다. 그래서 이 체제에서는 사업장에서 사업(생산)과정에서 노동의 조직과 사용에 관한 사항에는 노동자정당과 노동조합은 관심이 없었다. 사업장권력과는 달리 국가권력은 사람의 크기(수)로 결정됐고, 투표와 노동조합 등 노동단체의 국가기구 참여를 통해 노동자는 국가권력을 통제하고자 했다. 거대한 산별노조체제와 사회민주당 등 노동자정당이 노동자의 투표를 조직해서 국가권력을 노동자를 위해 행사하고자 했다. 그래서 국가에 의해서 사회복지, 사회보장 등을 통해서 노동자의 복지를 확보하고자 했다. 결국 세금과 보험을 통해서 복지국가를 세웠다. 이 세상은 자본주의를 굳이 수정할 필요도 없었다. 이 세상의 창시자들의 목표는 노동자의 복지였지 노동자의 사업장권력이 아니었다. 세금과 보험을 통해서 노동자의 복지는 해결되었으므로 자본의 사업장권력을 침해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단결권,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보장해서 노동조합의 교섭을 통해서 노동자의 사업장내 근로조건을 집단적으로 정하면 됐다. 한마디로 사업장은 자본의 것, 국가권력은 노동의 것이었다. 이렇게 세상을 노동은 자본과 공유하고 함께 했다. 그 뒤 나치에 의해 무너졌지만 1945년 이후 복원됐고 이 세상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어떠한 세상이든 그 세상에서 창시자는 교주가 되고 그의 말은 교시가 된다. 이 세상에서도 그랬다. 이 세상의 창시자들은 이 세상의 질서는 사업장은 자본의 것이고 노동은 국가권력을 통해서 복지를 추구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 세상의 창시자들이 추구했던 것은 노동자의 복지였지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은 아니었다. 그래서 사업장에서 노동자는 주인일 수 없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법질서로는 허용되지 않았다. 노동자가 주인이 되려는 일체의 행위는 불법이 됐다. 이 세상에서는 노동자가 주인일 수 없었다. 노동자는 사용자가 조직하는 대로 사업장조직에 배치됐고 사용자가 지시하는 대로 근로를 제공해야 했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교시됐고 법전에 새겼다. 그런데 2010년 12월 대한민국의 노동자는 불법으로 내몰려 짓밟히고 있다. 사용자인 현대자동차의 사업장권력을 인정하지 않고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주인이 되겠다고 한 것도 아니다. 이 세상의 창시자들이 정한대로 그들의 교시로 새긴 대한민국의 헌법질서 내에서 단체교섭을 통해서 근로자로서 근로조건을 정하고자 할 뿐이다. 그런데도 이 질서의 집행자인 노동부와 노동위원회는 현대자동차에 합세해 불법으로 내몰았다. 이 질서의 또 다른 집행자인 법원만이 현대자동차를 불법이라고 판단했으나 노동부와 노동위원회, 현대자동차는 이를 무시하고 내몰았다. 이것은 이 세상의 창시자들이 당연하게 전제한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사용하는 자를 상대로 근로조건을 정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통해 교섭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1918년 이 세상의 창시자들이 당연하게 전제했던 것이 대한민국에서는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노동자는 자신들이 절대 다수임에도 국가권력을 자신의 것으로 하고자 투표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헌법에는 1918년 에베르트가 열었던 세상이 기본질서 내지 기본원리라고 새겨놓았을 뿐 이 헌법의 집행자는 노동자권력이 아니다. 사업장권력은 자본의 것인 것은 명백하지만 국가권력은 노동자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세상이 자본주의를 수정한 세상이고, 사회적 시장경제와 복지국가라고 배웠다. 그리고 1918년 바이마르공화국헌법을 대한민국헌법의 모법인 냥 배웠다. 그래서 그들의 세상이, 그들의 나라가 우리의 세상이고 우리의 나라의 지향으로 알았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는 잘못 배웠고 잘못 알았다. 온갖 거짓과 왜곡이 노동자를, 우리를 무지로 몰아넣어 왔다. 그렇게 사업장 부문에서도 국가 부문에서도 자본의 의지가 관철됐다. 사업장권력이 자본의 것이고, 국가권력이 자본의 의지에 따라 작동된다면 우리의 세상은 자본과 노동이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선 자본의 전제적 지배가 관철될 수밖에 없다. 헌법에 아무리 많이 사회적 기본권들을 나열하였다고 해도 대한민국은 무슨 복지국가, 사회국가를 말할 수 없다.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에게 자본과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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