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을 점거한 채 보름 가까이 농성을 벌이고 있는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요구는 간단하다. ‘대법원 판결대로 정규직화하라’는 것이다. 이들은 “입만 열면 법과 원칙을 떠들던 정부와 사용자가 정작 법원이 판결을 내리니까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는 비단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법원은 최근 서울메트로에서 해고된 정아무개씨가 제기한 부당해고 소송에서 노동자의 손을 들어줬다. 그는 2008년 5월 ‘퇴출부서’로 불리던 서비스지원단에 발령받았다. 근무 부적응을 이유로 사실상 퇴출명단에 오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정씨는 서비스지원단으로의 전직발령을 거부하고 원래 부서인 토목사업소로 계속 출근했다. 회사는 정씨에게 무단결근으로 해고했다. 정씨는 중앙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내고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근무 부적응’을 내세운 전직명령은 그 자체가 부당하기 때문에 무효이고, 이를 따르지 않더라도 징계사유로 삼을 수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에 따르면 전직명령 사유로 삼은 근무 부적응은 지나치게 포괄적 개념이어서 인사권자의 자의적 판단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 그래서 근무 부적응을 이유로 한 전직명령 역시 인사권의 남용에 해당돼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서울도시철도공사에서 근무하다 지난달 18일 서울 독산동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박정호(44)씨도 마찬가지다. 경찰은 특별한 외상이나 유서 등이 발견되지 않아 돌연사로 추정하고 있다. 원래 그는 7호선 철산역의 부역장이었는데 2008년 8월 5678서비스단으로 발령받았다. 서울메트로의 정씨처럼 업무 부적응을 이유로 사실상 퇴출경고를 받은 것이다.

서울도시철도공사의 서비스단 인사발령 역시 지난해 서울동부지법으로부터 해고요건을 정한 근로기준법의 취지를 잠탈할 여지가 있다는 판결을 받은 바 있다. 법원의 판결 이후 서울도시철도공사는 직무재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고인을 직무재교육 대상자로 발령했다. 직무재교육도 사실상 퇴출 프로그램이다. 결국 박씨는 직무재교육을 거부하고 파업에 참가했다가 9월 직권면직 처분을 받았다. 그가 잇단 퇴출명령과 해고로 인해 상당한 스트레스 상태에 놓였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서울도시철도공사에 묻고 싶다. 만약 법원 판결을 수용해 고인을 퇴출명단에 올리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래도 박씨가 이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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