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이미경 민주당 의원이 박재완 고용노동부장관을 매섭게 질타했다. 같은 당 이찬열 의원은 “일자리 창출을 열심히 한 우수자치단체에 인센티브를 주는 사업을 고용보험기금으로 하고 있다”며 “노사에게서 걷은 돈으로 정부기관에 인센티브를 준다고 생색내는데, 이런 식의 업무가 있을 수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고용보험기금 재정건전성 문제가 국회에서 화두다. 지난달 국회예산정책처는 ‘고용보험 재정기준선 전망과 과제’ 보고서를 통해 “2013년에 실업급여계정 적립금이 고갈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야당을 중심으로 고용보험기금을 재원으로 벌이는 비효율 사업을 줄이고, 고용보험기금 사용이 부적절한 예산을 삭감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재정악화를 막으려면 수입을 늘리거나, 나가는 돈을 줄이는 두 가지 경우의 수를 놓고 조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노동부가 고용보험기금에서 지나치게 사업자금을 조달한다는 지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내년도 예산안에도 세출 기준으로 일반예산이 1조3천231억원인 반면 기금은 11조3천440억원이나 된다. 기금예산이 일반예산의 10배에 육박한다.
고용보험료율 인상은 ‘상수’
일반예산 비중을 늘리라는 주장에 대해 노동부는 난색을 표하고 있다. 박재완 장관은 환노위에서 “일반회계로 처리할 일을 고용보험에 의존한다는 의견은 귀담아들을 점이 많다”며 “일반회계 전출입 관계를 하루아침에 정리할 수는 없지만 노력하겠다”고 답변했다.
박 장관은 그러나 고용센터 청사매입 같이 용도에 맞지 않게 기금을 사용했다는 지적을 받는 사업이나 국가재정투입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는 모성보호 같은 사업에 대해서도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이기 때문에 지원하는 명분이 있다”고 말했다.
앞서 국회 예산정책처는 모성보호사업을 고용보험재정 악화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예산정책처는 “정부가 모성보호사업에 일반회계 보전액을 늘려야 한다”고 충고했다. 박 장관이 이를 거부한 셈이다.
지출을 줄일 생각이 없다면 남은 해결책은 수입을 늘려야 하는데, 방법은 보험료율 인상밖에 없다. 하미용 노동부 고용보험정책과장의 얘기다.
“지출은 늘어나는데 수입은 계속 제자리잖아요. 실업급여는 요율을 올려야 합니다. 한꺼번에 많이 올릴 것인가, 몇 년간 천천히 적립해 나갈 것인가의 선택만 남았을 뿐입니다.”
하 과장은 보험료율 인상에 대해 “실업급여를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논의”라고 강조했다. 요율 인상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는 얘기다.
노동부의 움직임도 가시화될 전망이다. 노동부는 다음달 안에, 늦어도 내년 1월에는 보험료율을 결정하는 고용보험위원회를 열 계이다. 조만간 이를 각 참여단체에 통보할 것으로 알려졌다. 위원회에는 노사정이 모두 참여하고 있다.
고용보험 재정 어떻기에
노동부의 다급함은 엄밀하게 말하면 ‘뒷북’이다.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는 2008년 5월 노사정 합의를 통해 적정 적립금 규모를 밝힌 바 있다. 실업급여 계정은 적립금을 전년도 지출액의 1.5~2배로, 고용안정·직업능력개발 계정은 1~1.5배로 쌓아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실업급여로 100억원을 지출했다면, 올해 적립금은 150억~200억원이 돼야 한다는 뜻이다. 이 적립배율은 고용보험법에 명시돼 있다. 노사정은 적립금이 범위를 벗어나거나 벗어날 우려가 있으면 보험료율 조정을 위한 논의를 개시한다는 데 합의했다.
문제가 터진 곳은 구직급여와 취업촉진수당으로 구성된 실업급여 계정이다. 실업급여 적립배율은 2006년 2.4배에서 2007년 2.0배으로 하락했다. 2008년에는 1.6배, 2009년에는 0.8배를 기록했다. 2010년에는 0.7배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내년 예산안대로라면 적립배율은 0.4배로 급락할 것으로 보인다. 노사정 합의대로라면 지난해 이미 요율조정 논의를 시작했어야 했다.
이는 노동부 스스로 자초했다. 정부가 청년고용대책이나 저출산대책을 발표하는 족족 고용보험기금 지출이 늘어났다. 지난해 2월 환노위에서 권선택 자유선진당 의원과 당시 장관이었던 이영희 전 장관의 얘기를 들어보자.
“기금 적립금이 7조9천억원인데 당초에 5~6년 정도 될 줄 알았는데 훨씬 더 빨리 소진되는 것 아니냐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권선택 의원)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고용보험은 기금을 통해 적립을 하게 되니까요.”(이영희 전 장관)
“지금 실업대책을 많이 내놓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고용보험기금을 활용한 정책이거든요. 예산투입 없이 기금만 가지고 모든 정책을 하겠다는 말인가요?”(권선택 의원)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현재는 (적립금을 지출액의) 1.6배를 갖고 있습니다. 만약 고용보험재정 자체가 좀 어려워지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저희들이 다른 형태로, 일반회계든 아니면 다른 방법을 통해서 해야죠.”(이영희 전 장관)
이날 논쟁 뒤 정확히 한 달 만에 정부는 추경예산을 편성했다. 그런데 노동부의 추경예산 2조9천354억원 중 고용보험기금이 2조1천157억원에 달했다. ‘서민희망 예산’이라는 이름으로 제출된 내년 예산 가운데 육아휴직급여 지원금 확대 사업과 육아기 근로시간단축 급여 사업도 고용보험기금 사업이다. 모성보호사업은 일반회계 재정투입이 필요하다고 줄기차게 지적되던 분야다.
‘기금 고갈론’의 피해자는 취약계층
이런 상황에서 보험료를 올리자고 하니, 돈을 내는 노사가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김판중 경총 사회정책팀장은 “법적인 기준으로 보면 요율을 올리는 것이 맞다”면서도 “고용보험 성질에 맞지 않는 사업이 있고, 부정수급이 확대되는데도 정부가 적절하거나 만족스러운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요율만 올리려고 한다”고 비판했다. 김 팀장은 “정부가 돈도 안 내고 노사한테 편하게 묻어가려고 한다”고 지적했다. 우문숙 민주노총 정책국장은 “노동부가 자의적으로 고용보험기금을 사용하는 행태는 바뀌지 않았다”며 “고용보험 사각지대에 있는 취약계층과 관련한 제도보완 없이 보험료만 올리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하미용 과장은 “사각지대 해소 이슈를 가져오면 재정이 나빠질 수밖에 없다”며 “현재 시스템을 유지하려고 요율을 올리는 것이기 때문에 사각지대 문제까지 논의하면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요율 얘기는 할 수 있지만 제도개선 논의를 할 여유는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병희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실업급여 제도개선 논의가 재정의 제약으로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며 “재정위기가 실업급여 운영을 엄격하게 하는 외부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선임연구위원은 “현재 틀에서 논의하더라도 보험료율을 올리려면 수급기간 정도는 늘려야 할 것”이라며 “사회보험 미가입자에 대한 정부 재정지원 문제도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