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파업은 시작됐다. 그리고 멈췄다. 현대자동차는 작동이 중지됐다. 고속으로 질주하다가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엔진이 정지됐다. 사내하청 노동자를 작동시켰던 현대차의 모든 기계장치와 그 계기들은 나가 버렸다. 컨베이어라인은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사내하청 노동자를 사용하던 현대차의 작동법은 소용이 없었다. 그 작동법에 의해서는 사내하청 노동자는 더 이상 작동되지 않았다. 베르나도, 클릭도, 액센트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현대차 울산공장 1공장에서 모든 것이 멈췄다. 더 이상 자본에 백지위임된 노동은 없었다. 주인의 감시도, 노예의 복종도 사라졌다. 이제 노동자는 컨베이어의 부착물이거나 종물이 아니다. 이렇게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는 파업으로 말했다. 자신이 무엇인지를 파업으로 말했다. 멈춰 버린 기계 앞에서 자동차가 생산되지 않는 공장에서 파업으로 말했다. 멈춰 버린 기계 앞에서 노동자의 기본권, 파업을 말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무엇인지를 말했다. 자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했다. 오직 파업으로 말할 수 있었다. 파업으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었다. 컨베이어라인의 부착물도 종물도 아니다. 노동에 의해서만 자동차는 생산된다. 노예가 아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파업으로 자신이 부착돼 있던 기계의 작동을 멈추고 당당하게 말했다. 정규직으로 전환해라. 더 이상 계약이라는 이름으로 권리 없는 노동자, 즉 노예로 살지 않겠다며 이렇게 외쳤다.

2. 11월15일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그리고 탄압에 맞서 1공장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이제 파업은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현대차에 사용자로서 단체교섭에 응하라고 요구했고, 거부되자 파업을 했다. 현대차는 7월22일 대법원 판결과 11월12일 서울고등법원 판결에 따른다면 사내하청 근로자들의 사용자이므로 단체교섭에 응해야 했다. 그래서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사용자를 상대로 단체교섭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파업에 돌입했다. 이전과는 달리 법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요구했고 파업했다. 컨베이어 의장공장의 경우 대법원은 근로자파견에 해당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아산공장은 의장공장만이 아니라 차체공장·의장공장·엔진공장까지도 서울고등법원은 근로자파견에 해당한다고 했으므로 이전과는 달리 기죽지 않고 파업을 했다. 그런데 사용자는 불법파업이라고 말한다. 아직 대법원에서 파기환송한 사건이 서울고등법원에서 판결해 확정된 것이 아니라면서 현대차는 불법파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법원은 확정판결을 받아야 그때서야 현대자동차가 사내하청 근로자의 사용자로 된다고 판결하지 않았다. 이미 2년 이상 근무한 사내하청 근로자는 현대자동차의 근로자라고 판결했다. 판결의 확정은 해당 소송을 종결짓는 것일 뿐 해당 법률관계가 그때서야 창설되는 것이 아니다. 법 앞에서 현대차는 이미 당당할 수 없다. 법 앞에서 현대차는 불법으로 파견근로자를 사용하는 불법행위자, 범죄자일 뿐이다. 그러니 이번 파업은 불법에 맞서는 투쟁이다. 따라서 권리를 위한 투쟁이다. 이번 파업이야말로 헌법이 보장한 근로자의 단체행동권의 행사다. 노동자에게 이 나라가 기본권, 즉 가장 기본적인 권리로서 보장해 준 권리다. 이 나라에서 노동자는 권리 없이 노동이 강요되는 노예가 아니라면서 보장해 준 노동자의 권리다. 이번 파업이 헌법에서 보장한 단체행동권 행사로서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의 파업이 정당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번 사내하청 노동자의 파업을 정당한 것으로 보장하지 않는 이 나라의 법질서가 정당하지 않아서다. 설사 법이 노동자의 파업을 정당하지 않다고 해서 그 파업이 정당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파업이 정당하지 않다고 한 그 법이 정당하지 않을 뿐이다. 파업은 일하지 않는 것이다. 파업은 이미 무노동무임금이다. 일하지 않는 데 따른 대가는 이미 치르고 있다. 일하지 않을 자유, 그것이 파업권의 실체다. 아무리 현학적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법률용어를 나열하면서 어떠한 파업은 정당하지 않다고 말하는 자는 자신이 정당하지 않은 것이다. 그 자가 교수이고 변호사이고 판사라도 정당하지 않은 것이다. 높은 수준의 추상적인 언어로 말해도 그 자가 말하는 결론이 무엇인지에 따라 그 자가 정당한지 아닌지 판단된다. 근로계약에서 정한 소정의 근로를 제공하지 않고 파업을 했으므로 그에 따른 손해를 져야 하는 것이라며, 무노동무임금에 따른 임금 손실 이외에도, 사용자의 생산판매손실을 말하면서 어떠한 파업은 정당하지 않다고 말하는 그 자는 노동의 이름으로 정당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 자의 말이 정당한 것이 되려면 노동자의 노동의 결과는 사용자에게 귀속될 수 없다. 사용자는 노동을 생산시설에 결합시켜 그 결과를 자신의 것으로 귀속시킨다. 따라서 노동의 사용에 따른 결과는 사용자의 것이기 때문에 노동의 사용에 따른 손실도 사용자의 것이다. 만약 사용자가 노동의 사용에 따른 손실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더 이상 노동의 사용에 따른 결과를 자신의 몫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 법질서는 태초에 노동의 사용에 따른 결과는 사용자의 것이라고 전제했다. 사업장 내의 노동의 조직과 사용은 사용자의 고유한 권한이라고 전제했다. 이것을 부정한다면 더 이상 자본주의 법질서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 자에게 말한다. 노동자에게 파업이 정당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자본주의 법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자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신도 이번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의 파업에 있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당신이 자본주의 법질서를 위태롭게 할지도 모른다는 것에 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자본주의 생산과정의 실체를 파악해 위와 같이 논의할 것도 없이 당신이 말해 온 쟁의행위의 정당성에 관한 논의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정당하기 때문이다. 쟁점은 단순하다. 과연 현대차가 사내하청 근로자의 사용자인가. 이에 관해 법원은 이미 그렇다고 판결했다. 당신이 현대차의 입이 되어 확정판결에 의해서만 사용자로 될 수 있다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지만 않는다면 당신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3. 노동기본권은 노동자의 권리다. 그런데 이에 관해 누구나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자는 약자이고 사용자는 강자여서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노동기본권을 보장했다. 그리고 노동법이 탄생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누구나’에게는 노동기본권을 보장한 노동법이 있는 자본주의 법질서는 약자를 보호해 주는 정의로운 법질서다. 그렇게 누구나 배웠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노동자가 약자여서 강한 사용자에 맞서도록 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어 협약을 체결하도록 교섭을 하고 파업을 해도 된다고 법으로 보장해 준 것인가. 계약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제한하는 사용자에 맞서 진정한 계약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정의로운 법은 노동기본권을 노동자의 기본권으로 보장해 준 것인가.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사실이 아닌지는 어떻게 말하는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사실 자체에 의해서 이미 정해진 것이다. 자본주의는 초기에 계약자유를 내세워 노동자가 노동조합으로 집단으로 계약을 체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 직후 제정된 르샤플리에법·영국의 단결금지법이 그것이다. 오직 이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의해, 노동운동에 의해 노조와 교섭, 파업은 실제로 행해졌고, 결국 법은 노조와 교섭, 파업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했다. 프랑스혁명 직후 자본주의 법질서를 세울 당시에 노동자가 약자가 아니어서, 사용자와 대등해서 노조와 교섭, 파업을 금지했던 것이 아니다. 이미 노동자는 사용자에 대등하게 맞설 지위에 있지 못했다. 아니 이미 법은 노동자를 사용자에 대등하게 맞서지 못할 지위를 부여했다. 그리고 노동운동은 봉건귀족에 맞서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한 시민계급(자본가)을 본받아 자본가에 맞서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했다. 시민계급이 봉건귀족에 맞서 자신의 계급적 이해의 관철을 위해 투쟁했던 것처럼 노동계급도 자본가에 맞서 자신의 계급적 이해를 관철하기 위해 노동운동을 전개해 왔다. 그래서 법이 노동기본권을 노동자의 권리로 보장했다. 이처럼 노동기본권은 약자인 노동자의 보호를 위해 보장해 준 것이 아니라 계급적 이해를 관철하기 위한 노동운동이 권리로서 쟁취해 온 것이다. 이번 사내하청 노동자의 파업에 관해 현대차는 말한다. 5년 된 사내하청 노동자의 임금이 3천500만원이다, 4천만원이다. 그러나 사내하청 노동자가 약자여서 파업권이 보장돼야 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이기 때문에, 그것은 전 세계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에 의해 쟁취한 노동자의 권리이기 때문에 당연히 보장돼야 한다. 더 이상 우리는 노동법은 노동자가 약자여서 권리를 보장해 준 법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우리는 노동기본권은 노동자가 약자여서 사용자와 대등하게 교섭하기 위해 보장해 준 권리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스스로 약자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고 지원해 줄 누군가를 찾고자 할 때나 하는 짓이다. 노동운동을 외부의 계급이나 세력에 호소함으로써 그 지원을 통해서 행하는 자의 말이다. 지금까지 이 나라에선 너무도 많이 그래왔다. 그래서 이 나라 노동자와 노조간부는 호소하기에 바쁘다. 일반 시민에게, 교수와 변호사 등 법률가에게, 국회의원과 정당에 호소하고, 심지어 정부와 사용자에게도 호소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운동가는 사회의 약자를 보호하는 사회활동가쯤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역사는 약자라고 호소함으로서 전개된 것도, 그것을 통해 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받게 된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조직과 투쟁에 의해 전개되고 보장됐음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 전개되는 노동운동은 외부 조건에 의해 쉽게 무너질 수 있다. 노동운동이 이를 망각할 경우 노동자의 권리는 외부세력에 의해 한순간에 잃어버릴 수 있다. 노동자의 권리는 무엇이 보장했는지 이제 분명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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