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금속노조가 환경단체들과 함께 발암물질조사결과를 발표하고 ‘건강한 자동차 만들기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했다. 한 시간 남짓 기자회견을 진행하는 동안 금속노조 노동안전보건실은 무척이나 바쁜 듯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바쁜 이유는 기자회견 때문이 아니었다.

14일 일요일 저녁 이미 MBC 뉴스데스크를 통해 자동차산업의 발암물질사용실태가 심각하다는 것이 보도됐다. 이때 벤젠이 0.1% 이상 함유된 시너나 세척제 등을 사용하는 사업장 명단이 공개됐다. 이 중에는 기아자동차 화성공장도 있었지만 7개의 부품사들도 포함돼 있었다. 기자회견을 하던 화요일 아침, 명단에 오른 부품사 노조들로부터 금속노조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라인을 외주화하겠다고 하거나, 회사가 그러는데 완성차회사로부터 거래를 끊겠다는 얘기를 들었다거나, 회사의 내부 정보를 외부로 기밀누설한 것에 대해 조합 간부를 징계하겠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제보 내용을 다 믿을 수야 없겠지만 현장에 긴장이 조성되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왜냐 하면 벤젠이 다량 함유된 시너나 세척제를 사용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부품사 사업주나 노동자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확한 사실관계는 이러하다. 세척제나 시너에는 납사라는 성분이 들어 있다. 납사는 정유회사에서 원유를 정제할 때 나오는 중간산물로, 이것을 활용해 휘발유나 등유를 만든다. 납사의 용도는 매우 다양하다. 석유화학사업장에서는 납사를 가져다가 크래킹공정을 통해 스티렌과 같은 물질을 제조하게 된다. 그리고 세척제·시너·이형제 제조회사에서는 정유회사로부터 납사를 사 와서 노동자들이 사용하는 화학제품을 제조하게 된다.
납사는 라이트(light)와 헤비(heavy)로 나뉜다. 말 그대로 가벼운 납사가 있고 무거운 납사가 있다는 얘기다. 이 중에서 가벼운 납사에 벤젠이 함유돼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유회사에서는 납사 종류별로 벤젠함량을 알고 있다. 따라서 시너나 세척제 제조회사에서 벤젠이 함유되지 않은 납사를 구매해 세척제나 시너를 제조했다면, 노동자들이 벤젠을 마실 이유가 없어진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번에 벤젠이 검출된 세척제나 시너를 만든 제조회사에서는 벤젠함량이 높은 가벼운 납사를 원료로 제품을 제조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벤젠을 따로 섞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벤젠이 함유된 제품을 사용하는 사업장의 물질안전보건자료(MSDS)에는 모두 납사라고만 성분이 기록돼 있었고, 벤젠함량은 전혀 언급돼 있지 않았다. 사업주와 노동자 모두 MSDS에 발암물질이 없는 것으로 돼 있으니 안심하고 사용해 왔던 것이고, 이번 일로 당황스러워하고 있다. 그러니 이들을 상대로 발암물질을 대책도 없이 사용한 파렴치한으로 몰아가려는 태도는 절대로 옳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노동부에서는 이번에 발표된 발암물질 조사결과, 특히 벤젠 검출의 문제에 대해 대책을 수립하고 현장에 대한 개선대책을 마련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건의 대책을 수립하실 노동부 관계자들에게 한 가지만 부탁드린다. 벤젠이 들어 있는지 어떤지 알지도 못하는 사업주를 못살게 굴어서는 절대 안 된다. 노동부가 할 일은 벤젠이 기준 이상으로 함유된 제품들이 얼마나 많은지 조사하고, 화학물질 제조회사들에 대한 감시와 견제장치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대책을 내놓는 것이다.
이번 일이 우리나라의 발암물질 정보소통이 개선되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바라며, 정부의 바람직한 대책 마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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