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권리를 위한 투쟁은 시작됐다. 파견법이 보장한 근로자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 시작됐다. “법의 수단은 투쟁이다.” 그렇다. 법이 보장한 권리를 위해 우리는, 즉 노동과 그 대변자는 투쟁한다. 파견법은 근로자를 위한 것이고 그 권리의 주장은 근로자가 해야 한다. 사용자의 권리침해에 맞서 저항해야 파견법상 근로자의 권리를 지킬 수 있다. 이 세계에서 사람은 오직 둘로 나뉠 뿐이다. 권리자와 의무자다. 다만 이 세계가 과거 세계와 다른 것은 권리자와 의무자가 소유에 의해, 계약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정의는 권리자가 권리를 찾아 행사하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정의는 의무자가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다. 법은 권리자에게 권리를 부여했다. 권리자의 권리가 침해된다면 이 세계의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권리자의 권리 주장에 의해, 권리를 위한 투쟁에 의해서만 이 세계의 정의는 세워질 수 있다. 그래서 이 세계에서는 “법은 투쟁이다.” 그래서 이 세계의 법질서를 적극 옹호해 그 정당성을 부여한 법철학자 예링은 “법의 수단은 투쟁이며, 법은 투쟁이다”고 말했다.

2. 지난 12일 서울고등법원은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사내하청 근로자에 대한 판결을 선고했다. 파견법상 근로자파견에 해당하고 파견법에 따라 2년 초과한 근무한 사내하청 근로자는 현대자동차의 근로자라고 판결했다. 차체공장·의장공장·엔진공장 등 메인라인과 서브라인 모두 파견근로라고 판단했다. 2005년 12월 사내하청업체 근로자 김준규 외 6인은 현대자동차를 상대로 자신들은 현대자동차의 근로자라는 근로자지위확인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비정규직 노조활동으로 사내하청업체로부터 징계해고를 당해 사내하청업체를 상대로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했지만 이미 기각된 뒤였다. 사내하청업체 근로자들은 자동차생산공정에서 현대자동차를 위해 근로를 제공했다. 사내하청업체의 자동차생산사업을 위해 근로를 제공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것은 현대자동차와 사내하청업체, 그리고 근로자 모두에게 명백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는 도급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근로자파견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파견법에 의해서는 2년을 초과해 파견근로자를 사용한 현대자동차는 사내하청업체 근로자의 사용자여야 했다. 그럼에도 도급계약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근로자파견은 아니고 따라서 파견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현대자동차가 주장했고, 노동부와 검찰도 결국은 그렇게 불기소처분을 했으며, 그리고 법원까지도 그렇게 판결했다. 당시 사내하청 근로자에게 권리는 없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도급계약을 체결했어도, 그래서 아무리 근로자파견이 아닌 도급계약이라고 주장하고 판정했어도 현대자동차는 자신을 위한 사내하청 근로자를 제공받아 자동차생산사업을 했다. 그것을 위해 현대자동차는 사내하청업체가 도급계약상 수급인으로서 사업조직을 갖추고 운영한 것처럼 관리했다. 하지만 사내하청업체는 현대자동차에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실체까지 숨길 수 없었다. 그래서 마땅히 사내하청 근로자는 현대자동차를 상대로 파견법상 권리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해야 했다. 예링이 말했던 권리자로서 권리를 위한 투쟁을 해야 했다. 하지만 사내하청 근로자 중 투쟁에 나선 자는 일부에 불과했다. 모두가 침묵했다. 투쟁은 비정규직으로서의 권리마저 상실됨을 의미했다. 때문에 모두는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포기했다. 해고자가 돼서야 일부만이 권리를 위한 투쟁에 나섰다. 이들은 자신만을 위한 투쟁의 수단인 소송을 통해서, 궁극적으로는 모두의 권리를 위해서 투쟁에 나섰다. 그리고 2007년 6월 마침내 서울중앙지법은 근로자파견에 해당한다며 2년을 초과해 근무했던 근로자는 현대자동차의 근로자라고 판결했다. 올해 7월 대법원도 울산공장 사내하청 근로자에 대해 같은 취지의 판결을 통해 서울고등법원에 파기환송했다. 그리고 올해 11월12일 서울고등법원은 위 서울중앙지법 판결에 대한 항소사건에서 아산공장 사내하청 근로자에 대해 위와 같은 판결을 내렸다. 위 대법원 판결이 선고된 뒤 현대자동차는 울산의 의장공장에만 해당하는 것이라고 그 의미를 축소해 주장했다. 울산공장에 한정되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메인라인의 의장공장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서 아산공장·전주공장 등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고 메인라인이 아닌 서브라인, 즉 엔진공장 등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대법원이 정규직과의 혼재를 근로자파견의 판단에서 언급했는데 사내하청업체 근로자들만이 분리돼 별도로 근무하고 있다면서 혼재가 아니라며 근로자파견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현대자동차는 어디까지나 수급인과 그 소속 근로자에 대해 도급인으로서 지시할 뿐 사용자로서 지휘명령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사내하청업체 관리자가 근로자에게 지시한다고 주장했다. 민법상 도급계약을 체결하는 당사자 사이에 얼마든지 그 일의 완성에 관해 자유롭게 정할 수 있는 것이라며 현대자동차는 도급인으로서, 사내하청업체는 도급계약상 수급인으로서 인정될 뿐이라고 주장했다. 독일의 판례와 학설을 내세웠다. 현대자동차의 주장을 옹호하는 교수의 논문을 적극 인용했다. 사내하청업체에서 이미 해고됐으므로 파견법상 현대자동차의 근로자의 지위가 인정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더해 현대자동차가 사용자가 아니라는 수많은 근거를 주장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의 주장은 명백한 실체에 의해 부정됐다. 현대자동차를 위한 노동력으로 제공되는 사내하청업체 근로자의 실체가 현대자동차의 모든 주장을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오히려 서울고등법원의 판결문에서 현대자동차가 제기한 수많은 근거와 주장들이 부당한 것이라고 낱낱이 확인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따라 결과적으로 이번 서울고등법원 판결로서 현대자동차는 11월4일 사내하청업체 근로자 1천941명이 집단적으로 제기한 소송에 관한 판단을 받고 말았다. 현대자동차가 내세웠던 근거들과 주장들이 판결에 의해 부정됨으로써 울산공장의 의장공정에 속하지 않은 현대자동차 자동차생산공장에서 근무하는 사내하청업체 근로자들이 모두 근로자파견에 해당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하고 말았다. 2005년 12월 우리가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시작했을 때는 권리를 위한 소수의 투쟁에 불과했다. 그러나 마침내 권리를 위한 다수의 투쟁으로 전환됐다. 그리고 모두를 위한 권리 투쟁이 될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예링이 말한 “법은 투쟁이다”는 주장을 입증하는 역사적 순간들이 전개되고 있다.

3. 예링은 “법의 목적은 평화이고, 그 수단은 투쟁이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법의 목적이 평화'여서가 아니라 법이 보장하는 우리의 권리를 위해 투쟁한다. 따라서 우리에겐 '법의 목적이 평화'가 아니라 법의 목적은 우리의 권리여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법의 목적이 평화라면 '법의 목적이 평화'라고 말한 예링을 부정한다. 평화는 우리의 권리를 보장해야만 올 수 있다. 따라서 우리에겐 ‘법의 목적은 우리의 권리이며 그 수단은 투쟁’이다. 우리는 예링이 아니다. 오직 권리와 의무로 사람의 관계가 정해진 이 세계에서 주인은 권리자다. 권리자가 이 세계의 주인이고 의무자는 이 세계의 노예다. 보다 많고 강한 권리를 갖진 권리자가 그 권리에 따른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의무자의 지배자다. 그것을 이 세계는 정의라고 선언했다. 이 세계에서 물건을 지배하는 권리를 물권이라고 했다. 이 세계에서 사람을 지배하는 권리를 채권이라고 했다. 하지만 물권은 채권과는 달리 모든 사람에게 주장할 수 있는 권리로, 결국 사람을 지배하는 권리일 뿐이다. 모두 물권과 채권 모두 이 세계에서 사람에 대한 지배 내지 권리의 범위를 정한 것이다. 이 세계의 지배자는 이 물권과 채권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예링은 말했다. “노예제나 농노제의 폐지, 토지 소유권의 자유나 영업 혹은 신앙의 자유 이 모든 것들은 치열하게 그리고 수세기에 걸친 계속된 투쟁을 통해 쟁취됐다.” 그렇다. 그래서 마침내 이 세계의 지배자들은 소유권에 의해, 권리의 소유에 의해, 물권과 채권에 의해 이 세계를 지배한다. 그리고 예링은 “법의 목적이 평화”라고 말했다. 노예제와 농노제를 폐지하고 소유권을 쟁취하기 위해 수세기에 걸친 투쟁의 결과로 이 세계의 지배자는 법전에 자신의 권리를 새겨놓았으므로 마침내 “법의 목적이 평화”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링의 평화는 우리의 평화가 아니다. 오직 노동에 의해 권리는 정당할 수 있는 것이고, 노동에 의해 권리는 존재해야 한다. 사내하청업체 근로자의 현대자동차에 대한 근로자로서의 권리는 파견법에 의해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사내하청 근로자를 포함한 현대차의 모든 근로자의 권리는 현대자동차(주)라는 지배자의 권리의 의무일 뿐이다. 실제로는 현대자동차(주)라는 법인을 내세워 의무는 없고 권리만 행사하는 권리이자, 이 세계의 지배자의 권리를 위한 의무자(근로자)로서의 의무일 뿐이다. 따라서 사내하청 근로자의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은 실제로는 권리자에게 의무자로서 지위를 확인해 달라는 투쟁일 뿐이다. 이러한 우리의 투쟁은 “법의 목적이 평화”라는 그들과 그들의 법적 대변자 예링의 말을 옹호하게 될 뿐이다. 노동에 의해 새겨진 법과 그에 따른 권리를 향한 투쟁만이 노동자가 의무자에서 권리자로, 노예에서 주인으로 될 수 있다. 그것은 예링의 말처럼 치열하고 계속된 권리를 향한 투쟁을 통해 쟁취될 수 있다. 예링의 말을 확인하면서 그리고 예링을 부정함으로써 노동의 권리를 향한 투쟁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 투쟁에 있어서는 이미 법으로 보장된 권리자로서 노동자는 소수가 아닌 다수가 권리를 위한 투쟁을 해야 한다. “수백 명의 군인이 군기를 내던지고 도망친다면 충실하게 진지를 지키고 있는 군사들의 상황은 점차 악화된다. 저항의 모든 부담이 도망가지 않은 자들에게 부가된다.”(예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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