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구미 소재 반도체 전문업체인 KEC 점거농성 사태가 심상치 않다. 금속노조 KEC지회의 농성이 장기화될 조짐이다. 회사측이 고용한 사설용역직원과 경찰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 공장 안과 밖은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28일 현재 노조원 170여명이 점거농성을 벌이고 있는 KEC 1공장에는 반도체 제작에 쓰이는 각종 인화물이 비치돼 있다. 경찰력이 투입돼 강제 진압될 경우 자칫 대형 불상사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날로 파업 134일째, 점거농성 8일째다. KEC 지회는 올해 최장기 파업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지난해 77일간 옥쇄파업이 진행됐던 쌍용자동차와 외형적으로 닮았다. 노조가 배수진을 치고 공장점거 농성을 벌이고 있는 반면 경찰과 사측이 이들을 고립시키며 압박하고 있는 모양새가 유사하다. 노조가 농성을 벌이고 있는 공장에는 인화물질이 비치돼 있어 경찰이 진압에 고심하고 있다는 점도 그렇다. 하지만 KEC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게 된 배경은 쌍용차와 다르다.

KEC 노사갈등의 발단은 구조조정이 아니었다. 대규모 정리해고 통보로 갈등이 예상된 쌍용차와 KEC의 처지는 달랐다. 쌍용차는 과거에도 매각 문제와 임·단협으로 파업이 일어난 경험이 있다. 반면 KEC는 지난 6년 동안 무분규 사업장이었다. 여성 노동자가 많은 반도체 사업장 특성상 노사관계는 매우 안정적이었다.

KEC 노사는 근로시간면제제도(타임오프) 시행을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회사측은 타임오프 한도(3명) 준수를 요구한 반면 노조는 종전 전임자수(7명) 유지를 주장했다. 단체교섭이 결렬되자 노조는 부분파업과 전면파업(6월21일)으로 대응했다. 그러자 회사측은 지난 6월30일 전격적으로 직장폐쇄를 단행했다. 회사가 고용한 용역직원들은 공장과 기숙사에 있던 조합원들을 공장 밖으로 내몰았다. 조합원들은 공장 옆 주차장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을 벌이는 것으로 맞대응했다. 이때부터 회사측은 지회의 교섭요구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

천막농성이 장기화되자, 지회는 ‘타임오프 한도를 수용하겠다’며 한 발 물러섰다. 반면 회사측은 ‘중징계(총 116명) 한 노조 간부를 인정할 수 없다’며 교섭을 거부했다. 노사 간 고소고발 문제까지 얽히면서 사태는 더욱 꼬였다. 때문에 10월 들어 노사 간 실무교섭이 네 차례 진행됐지만 진전은 거의 없었다. 이러다 보니 지난 21일 지회가 공장 점거농성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사태 전개과정을 보면 KEC 노사갈등은 고비가 있었다. 지회가 타임오프와 관련된 종전의 입장을 변경했기 때문이다. 핵심 쟁점이 해결돼 노사 간 교섭이 진전될 수 있었다. 이는 정리해고 문제로 촉발돼 해법을 찾기가 어려웠던 쌍용차 사례와 다른 점이다. KEC 노사갈등은 이렇게 까지 장기화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KEC 사태가 악화된 이유가 뭘까. 일차적으론 회사측이 사태 해결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면서 감춰 둔 속내를 드러내 사태를 키운 측면이 있다.

비공식 면담과정에서 회사측 관계자가 ‘간접부서 아웃소싱, 희망퇴직 시행’을 언급했다는 게 지회 관계자의 주장이다. 타임오프는 빌미였고, 회사측의 속내는 구조조정이라는 해석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최근 반도체 경기가 좋은 상태여서 KEC는 자금사정이 나쁘지 않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KEC가 구조조정을 추진할 뚜렷한 명분은 없다는 얘기다. 회사측 의도를 ‘구조조정설’로 단정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남는 것은 한 가지다. 회사측이 노조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 외에는 달리 해석하기 힘들다. 회사측이 노조를 무력화하는 수순을 밟고 있다는 분석이다. 최근 노사갈등을 겪은 금속노조 소속 지역지회들이 ‘직장폐쇄→용역직원 투입→상급단체 탈퇴’라는 수순을 밟았기 때문이다.

쌍용차 옥쇄파업은 ‘죽은 자(해고자)’와 ‘산 자’ 모두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죽은 자 대부분 실업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회사측의 손해배상 가압류로 인한 고통에 짓눌려 있다. 산 자도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 셋이 할 일을 한 사람이 감당하고 있으니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하기 힘들다.

KEC에도 경찰력이 투입돼 강제진압이 되면 이런 악순환이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회사측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강제진압 후 KEC는 자연스레 구조조정이 될 것이다. 노조도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가 될 것이다. 이것이 회사측의 의도가 아니길 바란다. 회사측은 노조의 교섭요구에 성실히 응해야 할 것이다.

6년간 무분규사업장이었던 KEC가 이 지경에 이른 데는 정부와 구미시도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정부와 구미시는 KEC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적극적인 중재에 나서야 한다. “20년 동안 뼈 빠지게 일했는데 이제 와서 쓸모없다며 나가라는 게 말이 되나”라는 농성자 가족의 한 맺힌 외침을 가벼이 여겨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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