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도 지났는데, 처지가 별 다를 바 없어 용역노동자는 늦더위 속 길에 앉았다.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칼 사이로 해 들어 빛났다. 거기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뭉쳐 이마로 흘렀다. 주름 두어 줄에 들어 고였다. 물방울 맺힌 생수통 들어 까맣게 탄 팔과 목과 머리 여기저기에 갖다 댔다. 가을 문턱, 좀처럼 가시질 않는 한낮 더위와 햇볕과 싸운다. 간접고용 불안과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두고 금손이라고 한다. 반대의 경우는 흙손·똥손으로 불린다. 흙수저·금수저 말 짓던 방식이다. 예전엔 미다스의 손이란 표현을 많이 썼다. 마이너스(-)의 손이 그 반대편 의미를 맡았다. 금손으로는 부족했던지, 다이아몬드손이란 표현도 종종 쓰인다. 흔치 않아 귀한 능력을 이른다. 노조 조끼 흔한 몸자보에 흔치 않은 그림과 문구가 붙어
공연 보러 나선 길, 아이는 광화문광장에 나부끼던 태극기에 관해 물었고 엄마 아빠 말이 허둥지둥 길었다. 거기 곳곳 내걸린 성조기와 파면당한 전 대통령의 사진 현수막까지 설명하느라 더운 날 진땀을 뺐다. 아이는 궁금한 게 많았는데, 그건 대개 아빠도 여태 명쾌한 답을 찾지 못한 것들이었다. 줄줄 흐르던 땀이 입으로 들었다. 씁쓸했다. 대형 스피커 통해 울려
옆자리 기자회견 기다리던 기자가 기웃거리자 기울어진 선전물을 세우려고 농성하던 사람이 바삐 움직였다. 그 아래 앉아 졸던 이의 머리가 자꾸만 기울었다. 맞잡은 손이 풀릴 때마다 화들짝 놀라 균형을 잡곤 했다. 오뚝이처럼 흔들거렸다. 폴리스라인이 세련되고 튼튼한 철제 구조물로 바뀌었다. 언젠가 시위 나선 사람들이 그 앞 담을 넘었다는 이유로 벽이 부쩍 높았다. 지키는 눈이 많았다. 시위대를 막기 위한 철제 펜스도 가지런히 인도에 누운 채로 상황을 대비했다. 그 틈틈이 이런저런 기자회견이 보도블록 좁은 틈 잡풀처럼 삐죽 솟았다. 무성했
여름, 친한 사람들은 관광버스에 올라타 먼 길을 떠났다. 커다란 여행용 배낭을 뒤져 간식을 나눴다. 수다가 멈출 줄을 몰랐다. 집에 남은 아이와 남편 얘기에 이르러서는 한숨도 섞였다. 마산톨게이트를 지나 고속으로 달린 버스는 서울톨게이트 너머 강남 고속터미널에 도착했다. 조끼를 맞춰 입은 동료들은 거기 상가에 들러 챙이 넓은 모자를 같이 샀다. 꽃무늬와 여
대량생산, 저비용, 고효율은 자본의 말이었다. 오랜 주문이었다. 대량해고, 고비용, 저효율 따위는 노동자를 향한 말이었다. 여전한 저주다. 해고는 죽음이라고 언젠가 잘린 사람들이 말했는데, 그건 연이은 죽음 끝에 뻔한 말이 되고 말았다. 낡은 노조 조끼엔 향냄새가 뱄다. 일터로 돌아가는 데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근로기준법의 시대는 저물어 가고 있다고 1
관심을 가지면 그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마트노동자들의 근골격계질환 문제를 제기하는 토론회 자리, 발표자는 저기 구석자리 스피커 아래 마이크 들고 선 방송사 노동자의 자세를 걱정했다. 앉아 듣던 사람들의 시선이 구석을 향했고, 웃음이 번졌다. 가벼운 지적이었지만 날카로웠다. 노동자 건강권에 대한 관심이 칠판 뒤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던 어떤 노동을 드러냈
청와대 앞길에 머리칼 툭툭 떨어졌다. 백 명에 이르는 집단의 것이었으나 제각각의 모양을 했다. 흰 머리, 검은 머리, 굽은 머리, 곧은 머리, 길고 짧은 머리가 그 바닥에 뒹굴었다. 저마다의 사연을 품었다. 엄마는 아이처럼 울었다. 우리 아이는 엄마처럼 비정규직 설움 겪지 않게 만들겠다고 삭발 나선 이유를 적었다. 취준생 아이가 비정규직 엄마 머리를 깎았다
이런저런 일이 생각대로 잘 풀리지 않았던 하루, 퇴근길 상념이 짙다. 종일 추적거리던 비가 그치고 저 멀리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빛이 짙었다. 교차로에 빨간불 들어와 급히 멈춰 섰다. '신홋발'이 마음 같지 않아 혼잣말이 툭 튀어나왔는데 과했다. 그래도 맨 앞이구나, 되지도 않는 이유 들어 마음 추슬렀다. 동네 친구 집에 맡겨 둔 아이 생각에 급했다. 어
길에 나설 일이라는 게 어디 좋은 날 잡고 기다려 주던가. 겨울이고 여름이고 미세먼지와 큰비 따위를 따질 겨를이 없다. 그저 몇 가지 필수품 챙겨 견딜 수밖에. 그중에 모자와 토시와 손풍기가 여름철 집회 '잇템'에 든다. 야구모자부터 세련된 밀짚모자까지 다양한데, 가성비와 착용감 등에서 저 꽃무늬 모자를 따라갈 게 없다. 조경 일이며 밭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위험을 보는 것이 안전의 시작이라고 오래전 어느 건설 현장 외벽에서 읽었다. 또 누가 집 짓다 떨어져 죽었다지. 높은 곳을 살핀다. 푸르던 하늘이 도심 빌딩 창에 맺혀 짙었다. 저기 높은 곳 줄에 매달린 사람을 본다. 낮은 곳에서 나는 비로소 안전함을 느낀다. 사람들은 대개 더 높은 곳으로 오르려 하지만 그곳이 외벽이길 바라지는 않는다. 위험은 수당으로 계
우리의 일은 음악입니다. 어렵지도 않은 뻔한 말을 새긴 현수막 앞에서 가수 연영석이 노래한다. 노조할 권리 보장 구호 높았던 129주년 세계노동절 대회 무대 옆이다. 사진이, 또 기록이 나의 일이었으니 찍었다. 아는 가수의 아는 노래를 들어 볼까 싶어 대형 음원사이트 여러 곳을 뒤졌는데 모르는 노래 한두 곡을 찾는 데 그쳤다. 바닥에 펼쳐 둔 기타 가방에
출근길 지옥철 국회선, 꽉꽉 들어찬 복도에서 꽥꽥 고성이 오갔다. 출입문이 끝내 열리지 않아 사람들은 출근하지 못했다. 살아는 있되 꼼짝을 못해 식물국회라고, 몸싸움만 끝없어 동물국회라고도 불렸다. 종종 난장판, 개판이라고도 했다. 학생들은 견학을 왔다. 로텐더홀에서 국회 역사에 대해 들었고, 기념촬영을 했다. 국회의원님 안녕하세요, 개중에 넉살 좋은 학생
봄꽃 떨어진 자리에 새잎이 돋는다. 쑥쑥 자란다. 다 말라 죽은 듯 갈색빛 황량한 풀섶에도 가만 보니 초록 새싹이 쑥쑥 오른다. 늙어 허리 굽은 할매가 쑥을 뜯는다. 봄볕 아린 날이니 모자가 깊었다. 때때로 바람 차 소매가 길었다. 할매는 오래도록 봄이면 쑥을 뜯었다. 쑥국을 끓이고 쑥떡을 빚어 어린 자식 밥상을 차렸다. 쑥쑥 자라 이제는 엄마 따라 늙은
단식 열흘째, 재춘씨가 웃는다. 친구 혹은 동지 또는 투쟁 선배 행란씨가 찾아왔는데 좁은 천막이 시끌벅적하다. 진작에 온 줄을 알았다고. 굶는 사람 앞에서 죽는 얘길 할 수도 없어 행란씨는 사는 얘기를 죽 풀어낸다. 그게 다 먹는 얘기다. 녹색병원 앞 분식집 순대부터 또 어디 맛나던 요리까지. 기어이 그 앞에 빵 두 봉지를 풀고 먹는다. 쫄깃한 게 이 빵
용균이 엄마는 종종 웃었고, 자주 울었다. 잠시 눈 감을 때면 어김없이 눈물 흘렀다. 깊은숨 뒤로 먼 데 바라보는 눈에는 주렁주렁 천장 등이 맺혔다. 보냈다지만 어찌 보낼 수가 있느냐고. 엄마는 그저 입술을 꼭 깨문다. 숱한 김용균이 아직 살아 줄줄이 죽음으로 향하는 컨베이어벨트를 탄다. 내가 김용균이라고 닮은꼴 사람들이 지난 두 달여 외쳤다. 더 이상 죽
노숙과 단식농성, 오체투지가 이어지는데 그 어느 하나 새로울 것이라곤 없어 공무원 해고자들은 척척 해낸다. 농성계의 ‘고인물’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노상 추위를 어쩌지는 못해 앉으나 서나 침낭 차림이다. 석순처럼, 또 고인돌처럼 우뚝 섰다. 커다란 돌덩이 어깨에 나눠 지고 해고자들은 길에 산다. 찬바람 길, 침낭 밖은 위험했다. 주머니 구석구석 핫팩을 품
쌍용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는 김정욱씨가 경찰청 앞에 섰다. 작업복 차림인데, 이제 복직 한 달째니 빳빳한 새것이다. 등에 붙은 반사 필름이 각도에 따라 반짝거렸다. 노동자 안전을 위해 고안된 것인데, 어두운 곳에서 눈에 띈다. 작업복의 상징이다. 요즈음 멋쟁이들 패션 아이템으로도 번졌다. 공장에서든 거리에서든 사람을 잘 보고 살피란 뜻일 테다. 사람이 먼저라
길에서 팻말 든 사람들은 장갑 없이 맨손이다. 할 말이 끓어넘쳐 손이 붉다. 종종 떨린다. 손끝 아린 겨울 한복판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또 누구나의 봄을 기다린다. 자식 잃은 엄마는 딸아이 앞세운 백발의 아빠를 만나 손 맞잡았다. 비로소 엷게 웃었다. 딸아이 휠체어 밀던 엄마를 만나 부둥켜안았고, 부르튼 입술 걱정을 나눴다. 앞서 세월을 견딘 노란색 점퍼
가방에선 양말과 속옷, 세면도구와 보조배터리 따위가 나와 여느 여행 가방과 다르지 않았다. 노조 조끼와 깔판이며 핫팩과 높은 산에서나 쓸 법한 두툼한 장갑이 딸려 나와 조금 달랐다. 청와대 앞길 비닐집에 사는 이재열 공무원노조 서울본부 부본부장의 짐이다. 농성장에 널린 가방 중에 가장 말끔한 것이었다. 여행용으로 산 것인데 농성용으로 쓴다고 했다. 농성장 당번이 돌아와 짐 꾸릴 때마다 해고자 처지를 깨닫는다고. 다시 여행용 가방으로 쓰고 싶다며 웃었다. 옆자리 누구나가 예상했던 것들이 거기 들었다. 길바닥 생활 오랜 사람들은 남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