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온다 소리에도 울음 그칠 줄 모르던 아이가 곶감 준다 소리에 뚝 그쳤다는 건 옛날 얘기다. 동네 책방 마당에 감 따러 가자고 아이를 꾀어 보는데 듣는 척도 안 한다.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과 넷플릭스 시청권 따위를 내밀고서야 나설 수 있었다. 곶감보다 맛있는 게, 감 따는 것보다 재밌는 일이 널린 시절이다. 어릴 적 곶감 하나 달라고 조르면 엄마는 딱 잘라 없다고 말했는데, 어느 밤 제사상엔 분이 뽀얗게 오른 곶감이 틀림없이 올라왔다. 부엌 창고 깊숙한 곳을 뒤지다 등짝을 맞곤 했다. 클릭 한 번이면 다음날 새벽에 무엇이든 받
오토바이엔 두 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중 뒤쪽에 앉았던 사람이 가게 앞까지 날아왔다고 바퀴 고치던 자전거가게 사장님이 말했다. 바퀴에 바람 넣느라 그 앞에 섰던 사람들은 넘어진 오토바이에서 뜯겨 나간 잔해와, 배달통을 튀어나와 날아간 포장음식 따위를 살펴보다 혀를 찼다. 거길 지나던 동네 사람들에게 사고의 경위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틈틈이 인도 한편 구석에
얼마 전 수동변속기 트럭을 운전해 봤다. 20여년 만의 일이었는데 용케도 몸이 기억했다. 흥미로운 경험이었지만 다시 하고 싶지는 않았다. 불편했다. 공동현관 자동문을 열고 들어서면 자동으로 거실 조명이 켜지고 음악이 흐르며 아침이면 자동으로 커튼이 열리는 이른바 ‘스마트홈’이 이제 낯설지 않다. 한 전기차 업체는 얼마 전 완벽한 수준의 자율주행 전기차를 공
오늘 주문하면 내일 받아 본다는 건 이제 인터넷 쇼핑하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당일 배송도 더는 낯선 일이 아니다. 넓지 않은 땅덩어리와 촘촘한 물류망과 거기 붙은 온갖 첨단 자동화 시스템 때문이라고 하던데, 배달노동자의 근력과 잰걸음과 저녁 없는 삶, 갖은 노하우 덕이라고도 한다. 언젠가 드론이 날 것이라지만, 지금은 사람이 뛴다. 몸을 갈아 넣
사진은 자주 관습에 기댄다. 노동자의 붉은 머리띠와 노조 조끼, 구호 외치는 팔뚝 같은 것이 그렇다. 머리띠를 질끈 묶는 장면 같은 것은 투쟁 의지를 보여준다고 여겨졌고 흔히 사진으로 담겼다. 오래도록 많은 이들이 그랬으니 관습으로 여길 만했다. 대규모 집회는 물론 기자회견 자리에서도 머리띠가 빠지지 않았다. 상징이었다. 요즘 머리띠 보기가 어렵다. 마스크
길에서 오래 싸운 사람들은 돌고 돌아 서울 서초동 대법원 건물 앞에 선다. 거기 벽에 새겨진 자유·평등·정의 세 문구를 대놓고 의심하는 자는 없었으니 앞자리 모인 누구나가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현수막은 두 개를 준비했다. 카메라 앞에서 읽어 내릴 기자회견문도 두 가지였다. 오래 묵은 오만가지 표정은 꾹꾹 눌러 담은 채 선고를 기다린다. 울고 웃는다. 지
오랜 큰 비 그치니 폭염, 땡볕이 따갑다. 어쩔 수도 없어 길에 선 사람들은 가쁜 숨 내쉬어 가며 그저 견딘다. 물기 잔뜩 머금어 무겁던 종이 상자가 다 말라 할매는 그나마 짐을 덜었다. 기근을 버텨낸 노인들이 유모차를, 바퀴 덧대어 개조한 손수레를 부지런히 밀고 끈다. 밀린 밥을 번다. 미룰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고개 숙인 채 느릿느릿 도로가를 거슬러 간
거북이 등껍질 같은 가방을 멘 라이더는 토끼처럼 빨라야 했다. 재빨리 눈을 굴려 콜을 확인해야 했고, 밥이 식기 전에 자전거와 오토바이 타고 내달려야 했다. 신호등 붉은빛은 밥 식는 신호였고, 평점 깎이는 표시였다. 차와 차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좁은 틈이 갈 길이었고, 살길이었다. 세차게 쏟아지던 장맛비 속에서도 페달 질을, 액셀러레이터 당기는 일을
2003년 현대차 아산공장에서 한 노동자가 월차를 쓰겠다고 했다가 관리자에게 떠밀려 머리를 다쳤다. 그 관리자는 병원에 실려 간 노동자를 찾아가 식칼로 아킬레스건을 그었다. 이른바 ‘식칼 테러’ 사건이다. 월차를 쓰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을 더는 참지 않겠다며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이틀간 공장 라인을 세웠다. 이를 계기로 아산과 울산, 전주 공장에
거기 새길 말이 많아 팻말이 크다. 할 말이 또한 많아, 기자회견이 길다. 그러니 뒷자리 팻말 든 사람들은 오래 벌을 선다. 거기 새긴 말이라곤 법원 판결에 따른 정규직화 실시하라, 불법행위 중단하라 같은 것이었는데, 상식에 드는 뻔한 말을 재차 하느라 마이크 든 사람들 목에 핏대가 선다. 팻말 든 사람들 팔을 덜덜 떤다. 기어코 노동청 앞에 천막이 섰고,
소처럼 일하던 사람을 여럿 잃고서야 일터를 고친다. 영정 앞 굳었던 약속은 금세 흐지부지되기 일쑤여서 오늘 산 사람들은 어제 죽은 자의 일터에서 분초를 다툰다. 퇴근을 미루고 끼니를 미루고 여름휴가를 미뤄 가며 밥을 번다. 닮은꼴 죽음이 잇따랐다. 일터를 바꾸는 것을 더는 미룰 수 없다며 길에 선 사람들이, 고개 숙여 명복을 비는 것으로 말을 시작한다. 어
한 기업 오너가 4년간 재판받는 게 정상이냐고 어느 국회의원이 묻는다. 기업활동에 차질을 빚을까 걱정하는 목소리가 뉴스페이지 곳곳에 높다. 경제가 어려운데, 기업이 어려운데, 어느 돌림노래 후렴구 같은 말이 앞선다. 최저임금을 삭감하자고 나선다. 도대체 멈출 수는 없는 것인지, 이 와중에도 꼬박꼬박 일터에서 사람이 죽어 간다. 코로나19 위기 비상시국에 일
저기 허리 굽힌 노동자들은 인천국제공항으로 출근해 그곳을 쓸고 닦고 가꾸지만 지금 누구도 저들이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일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어디 감히. 눈 돌리는 곳마다 비정규직이다. 그건 지금의 상식이다. 오래전 어느 공장 구내식당에서 밥 짓던 엄마는 그 회사 직원이었다. 그 또한 상식에 속했다. 몇 년 근속 기념으로 상패와 작은 금붙이를 받아 오
언젠가 출입국하는 사람들로 내내 붐볐던 공항에 인적이 뜸하다. 거기 일하던 사람들은 기약 없는 휴직 중이거나 잘렸다. 적막한 그곳에 수선 작업하는 노동자 수레 끄는 소리만 달그락달그락 크게 울린다. 먼 옛날의 무덤처럼, 절터처럼 일터엔 사람의 흔적만이 남았다. 산 사람들은 지금 출국장이 아니라 높다란 빌딩 앞 작은 농성 텐트로 출근한다. 뜯기고 무너지기 일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었다는 성공회성당 건물 앞으로 1천300여년 전 만들었다는 첨성대를 본딴 조형물이 섰다. 코로나 극복을 위한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라고 전시 기획자는 알렸다. 하늘을 올려다 보니 검은 구름 두텁다. 비 예보가 있었지만 바깥 일을 미룰 수도 없었을 터, 그 앞 일하는 사람 등이 젖는다. 이미 땀에 젖은 티셔츠에 빗방울이 별 일도 아니
서울지하철 구의역 9-4 승강장 스크린도어에 다시 포스트잇이 빼곡 붙었다. 혼자서 안전문 고치다 죽은 김군의 4주기, 닮은꼴 죽음이 멈추질 않아 거기 적힌 내용이 처음과 다를 바 없다. 그 앞 죄지은 듯 고개 숙인 사람들 얼굴에 마스크가 조금 달랐을 뿐이다. 실은 그게 다 익숙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날마다 명복을 빈다. 새로운 죽음 앞에 지난 죽음을 떠올리
밥 짓느라 거칠어진 저 손은 밥 버느라 휘고 군살 깊어 볼품없다. 비행기가 내리면 헐레벌떡 뛰어올라 기내식 음식쓰레기 자루를 단단히 묶고 들고 옮겼다. 화장실 오물을 치우고 쪼그려 앉아 구석진 곳을 닦느라 손이 내내 바빴다. 일손이 늘 부족했다. 밀려드는 비행기 스케줄 따라 일터는 도깨비시장이었고 전쟁통, 아수라장이었다고 손 임자가 전했다. 고래심줄만 살아
언젠가 서울지하철 구의역에서 청년 하청노동자가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끼여 죽었다. 유품으로 남은 컵라면을 들고 사람들이 울었다. 또 언젠가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청년 하청노동자가 컨베이어벨트에 말려 죽었다. 사람들이 컵라면을 쌓아 두고 엉엉 울었다. 왜 자꾸 죽는지를 길에서 물었다. 돈 때문이었다고, 누구나가 아는 답이 짧았다. 책임을 묻고 대책을 만드는 일이
제자들 없는 텅 빈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쓸쓸한 스승의 날을 맞았다는 기사가 난다. 코로나19 시절의 풍경이다. 노조할 권리 없는 선생님들이 오늘 또 한 번 거리에서 씁쓸한 스승의 날을 맞는다. 이명박 정권에서 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진 전교조 법외노조화 공작의 결과다. 촛불정부 시절의 여전한 풍경이다. 스승의 날 앞이라고, 대법원 앞에 선 해직교사 가슴에 카네
“때때로 그는 점심을 굶고 있는 시다들에게 버스값을 털어서 1원짜리 풀빵을 사 주고 청계천 6가부터 도봉산까지 두세 시간을 걸어가기도 했다.” 배우 조진웅이 1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전태일다리에서 전태일평전 일부를 낭독했다. 코로나19 사회연대기금 모금과 5명 미만 사업장 근로기준법 적용, 전태일 50주기 캠페인 첫 주자로 나선 그는 “이 시대를 힘겹게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