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직업의 앨리스입사와 함께 바로 간부가 되는 신입사원이 있다. 수만명 혹은 수십만명 조합원이 소속된 지역과 전국단위 노조에 채용된 사무처 신입이 그렇다. 차장이나 부장의 직함을 받고 일을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기업의 차장이나 부장이라면 경력도 끗발도 꽤 있다. 그런데 신입사원이 부장이 되는 일이 노조에 흔하다.군사독재 시절에 꽤 많은 사람이 현장에서 악전고투를 치른 끝에 1990년대에 들어서서 비로소 민주노조들이 정착했다. 민주노조들이 지역과 전국을 연결해 상급단체를 만들었다. 이런 곳에서 활동하게 된 사람들 대부분이 현장 활
학문은 왜 존재하는가?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진리는 나의 빛’(베리타스룩스메 veritas lux mea)이라는 단어를 모토로 삼고 있는 한 대학에서 가르치는 내용들이 진리라고 평가하기 어렵다. 그 대학에 마르크스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딱 한 분 있었다. 을 우리말로 번역한 그가 정년퇴임한 후 그 대학에서는 그의 후임자를 뽑지 않았다.마르크스 경제학만이 진리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수만명의 경제학자들이 있고,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사람들만도 수십명인데도 부르주아 경제학은 어찌해서 2008년
조합원들과 회의가 끝난 뒤 가볍게 맥주를 마셨다. 대화 중에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내 입에서는 ‘공존 가능성’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적대’ 혹은 ‘대립’ 속에서 서로를 악이나, 이해 못 할 존재로 몰아세우는 것이 아닌 세 번째 길을 모색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한 조합원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런 건 없다고 말했다. 단호한 그의 이야기에 생각이 복잡해졌다.서울퀴어퍼레이드지난 토요일, 청년유니온 조합원들과 함께 서울광장에서 개최된 ‘2022서울퀴어퍼레이드’에 다녀왔다. 3년 만에 오프라인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지난 8일 지원 유세 중 총격을 받고 숨졌다. 다음날 아침 여러 신문에 총격 직후 도망하는 용의자를 정장 입은 남자들이 붙잡는 사진이 실렸다. 한겨레는 2면에, 중앙일보와 조선일보는 3면에 해당 사진을 실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뒤에서 용의자의 양팔을 붙잡고, 같은 복장의 또 다른 남자는 바닥에 쓰러진 채 용의자의 왼쪽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뒤에 우산 쓴 여성과 자전거 탄 남성의 위치로 봐서 세 신문은 같은 사진을 실었다.그런데 세 신문의 사진 출처는 제각각이다. 한겨레는 ‘나라/로이터 연합뉴스’
고용노동부가 운영하는 ‘미래노동시장연구회’가 지난 18일 출범했다. 연구회는 “지속가능하고 미래지향적인 노동시장 구축”을 위한 구체적 정책을 제시하는 것이 목표다. 정부는 꽤 힘을 싣는 모양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노사정 대화를 기대하기 어려우니만큼, 전문가의 권위를 정부 정책의 정당성으로 내세우려는 것 같다. 하지만 노동계가 “답정너”라고 비아냥거릴 정도로 대략의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다. 노동시간은 유연화하고, 임금체계는 직무·직능적 성격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이 여러 차례 강조했던 바이기도 하다. 이정식 고용
며칠 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온 한 장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기온 31.5℃에 습도는 80%, 또 하루는 36.7℃에 습도는 43%. 두 날짜 모두 온열질환에 노출될 만한 상태다. 하루는 습도가 너무 높아 체온이 올라가는 상태며, 또 하루는 폭염경보에 해당하는 온도다. 이곳은 쿠팡 물류센터였다. 정신없이 컨베이어가 움직이기에 노동자들은 온몸이 땀으로 젖도록 일을 한다. 컨베이어에서 일하지 않는 노동자도 하루 2만보 이상을 찍을 만큼 몸을 많이 움직여야 한다. 상하차를 하는 노동자들은 더할 나위 없이 노동강도가 높다
열흘 전쯤, 연일 쉴 틈을 갖기 어려웠던 에어컨이 멈췄다. 인터넷 친구들과 매뉴얼 조언에 따라 전원을 차단하고 기다리길 수 시간. 수 차례의 시도에도 더운 바람을 내뿜다 오류 코드를 깜빡이는 에어컨. 어쩐지 여름날의 ‘과로’를 토로하는 것 같아 안쓰럽다. 기계도 사람도 견디기 어려운 날들을 살아간다.주말을 지나 연락이 닿은 서비스 센터. 상담원과의 대화는 사과에서 시작해서 사과로 끝이 난다. 긴 통화 대기시간에 대한 사과, 고장으로 불편을 겪게 된 것에 대한 사과, 한 달 이후에나 가능한 방문 점검과 수리 일정에 대한 사과. 아침부
얼마 전 파업이 한창인 옥포조선소 하청노동자들에게서 임금체불 문제로 상담이 들어왔다. 사내하청업체가 폐업을 예고한 상황에서 5월분 임금을 대부분 지급하지 않고 있었던 것.폐업이 사실이라면 당시 하청업체의 재산은 7월10일 원청인 대우조선에서 입금될 도급대금이 전부였다. 이에 급하게 도급대금채권에 대해 채권가압류신청서를 작성하는데, 하청노동자 상당수는 큰 숫자 앞에(-)표시가 된 통장잔고를 보유 중이었다. 급여명세서에 적힌 실수령액란을 보니 왜 그런지 이유를 알 듯했다.5월 한 달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한 대가로 책정된 급여는 290
“비상식적인 언행으로 진정인을 압박하고 괴롭힌 사실이 인정되므로 위 판단요소 ②(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을 것)와 ③(신체적·정신적 고통 야기 등)에 해당하나 ①(관계의 우위)이 있다고 단정할 수 없어 직장내 괴롭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음. 끝.”최근에 대리했던 직장내 괴롭힘 신고사건 처리결과 통지문서의 일부다. 공교롭게도 이 건도 지난 7월5일자 노노모의 노동에세이(노동부 의정부지청의 이상한 법집행)에서 언급된 노동지청에서 처리한 사건이다. 위 신고사건 처리결과 통지에 따를 때 내 의뢰인은 괴롭힘 피해자는 맞지만 직장내 괴롭힘 피해
인간의 체제에서 그 어떤 법과 제도라도 완전한 것은 없으며, 나라마다 사회 상태가 다른데 제도만 이식해서 같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장기 이식하듯 ‘제도 이전’을 할 수 없기에 긴 논의 과정이 변화를 이끈다. 가령 일본은 저출산-고령화를 먼저 경험한 나라로, 우리와 노동시장·노사관계·정치세력에 비슷한 점이 있어 종종 소개되는데 그 속도와 방식에 생각할 부분이 있다.한일 모두 법적 정년은 60세지만 가장 큰 차이는 정년까지 일할 수 있는 사람의 비율이다. 일본 정년제는 정년까지 고용보장을 의미한다. 일본도 종신고용 시대가 끝났다지
1. ‘참담하고 부끄럽다’ 지난주 수요일(13일)에 읽었던 기사 제목이다. 포털뉴스에서 제목에 끌려 나는 마지막 줄까지 읽고서 문자메시지로 저장해 두기까지 했다. 18일 출근해서 를 펼쳤다가 이에 대한 칼럼을 봤다. 저장해 둘 만큼, 곰곰이 생각해 볼 정도로 곱씹고픈 뉴스였음에 틀림없고, 그래서 나는 이렇게 끄적거리기 시작했다.2. 청소·경비 노동자들을 상대로 연세대 재학생들이 고소와 민사소송을 잇달아 제기하자 졸업생들이 13일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한다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후배들의 행위에 대한 선배들이 성명을 통해
사람은 홀로 모든 일을 해내기 어려워 공동체를 이뤘다. 그 안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살아간다. 대학이라는 공간도 마찬가지다. 대학 캠퍼스 안에는 여러 사람이 함께 살아간다. 학생·교수·교직원, 그리고 학교를 관리하는 노동자들이다.올해 3월부터 연세대 청소노동자들이 쟁의행위를 시작했다. 노조의 근로조건 개선 요구와 지방노동위원회의 권고안을 용역업체들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하청인 용역업체들이 권고안을 거부한 이유는 원청인 학교가 거부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요구안을 들으면 놀라게 된다. 너무 별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시급
근로감독이란 말은 영어 labour inspection에서 온 말이다. 여기서 labour를 한국 정부는 노동이 아니라 근로로 번역하고 있다. 한국 노동법에서 ‘근로’는 정체가 애매모호한 개념이다. 근로기준법 하나만 보더라도 근로는 조항에 따라 노동(labour)이 됐다가, 일(work)이 됐다가 고용(employment)이 되기도 한다. 노동과 일과 고용은 엄연히 그 뜻이 다르지만 한국의 노동법에서는 노동과 일과 고용이 서로 뒤섞여 뒤죽박죽이다.재미난 사실은 labour inspection을 근로감독으로 번역하는 한국 정부가 근로
다큐영화 로 바빴던 지난해와 비교하면, 올해 노회찬 의원 4주기 추모주간은 저마다의 의미가 남다른 다양한 행사들이 진행되고 있다. 연극 〈산재일기〉를 전태일기념관에서 4일부터 10일까지 일주일 동안 공연했다. 13일에는 ‘6공화국을 넘어 새로운 공화국으로’라는 제목으로 정책토론회가 열렸다. 20일에는 한국수사학회와 함께 ‘노회찬의 말과 글’이라는 주제로 토론회가 열린다. 곧 출간될 을 집필한 이광호 작가의 강연과 대담도 두 차례 열린다. 재단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들어갈 수 있는 온라인추모관에는 ‘소통
“에쓰오일에 불났다. 너네 직장은 별일 없제?” 친구가 보낸 문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문자와 동시에 전송된 동영상에선 몇 번 스쳐 지나간 에쓰오일 울산공장이 폭발사고로 활활 불타고 있었다.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던 차에 전국 안전관리자들이 모여 있는 단톡방을 봤다. 많은 안전관리자가 ‘에쓰오일에서도 저런 큰 사고가 나냐’며 여러 이야기를 했다. 에쓰오일은 안전관리 수준이 높은 업체다. 휘발성 물질, 석유류 제품을 취급하기 때문이다.폭발 화재사고는 전국 방송을 타고 말았다. 하청노동자 한 명 사망, 원·하청 노동자 아홉
“고개 빳빳이 드는 정치 하지 마세요. 나중에 ○됩니다. ㅋㅋㅋ”“안 되겠다. 곧 한 대 맞자. 조심히 다녀.”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성남시장을 하던 2010년부터 약 3년7개월간 수행비서를 했던 백종선씨가 이 의원을 비판한 민주당 의원들 페이스북에 남긴 글이다.백씨는 민주당 윤영찬 의원과 이원욱 의원에게 이 글을 남겼다. 백씨는 문제가 불거지자 사과했다.(조선일보 6월14일 6면 “‘한대 맞자’ 협박글 쓴 이재명 前비서, 논란일자 사과”)백씨는 사과 글도 의원들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앞으로 죽은 듯이 조용히 의원님의 열정을 세
우리나라 노동시장에서 신분이 보장된 정규직 신입사원의 대규모 공개채용은 이제 옛이야기다. 경제위기와 불안정한 경영환경으로 인력운영에 부담을 느낀 기업들은 경력직을 선호한다. 불가피하게 신규채용이 필요할 경우 신규채용 노동자의 능력과 적성을 파악하고 회사에 적응시키기 위해 정규직 채용을 유보하고 기간을 두는 것도 필수적이다. 인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신입사원 선발 방식이 대표적인데, 이명박 정부 이후 대기업과 공기업을 중심으로 채용형 인턴이라는 제도가 신규채용의 일반적 경로가 됐다.구직자가 해당 기업의 사업 환경을 이해하고 업무를
최근 한 SF소설을 읽다가, 참 진부하나 여전히 중요한 질문이 하나 떠올랐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건 무엇인가?’종교를 믿는 이들은 신을 올려다볼 것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으며, 인간은 신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면 된다고 하면서. 그러면 이성이 반기를 들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다. 생각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신의 말씀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뜻한 바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 대답 역시 만족스럽지 않다. 인간은 이성적이기만 한 건 아니다. 감정에 쉽게 휩싸인다. 이성으로 설명하기 힘든 무의식도 있다. 자칭
“얼마면 될까, 얼마면 되겠냐?” TV드라마 에서 원빈은 송혜교를 보면서 사랑을 돈으로 사겠다고 외쳤다.이 대사가 떠올랐던 것은 최근의 일이다. 집회신고에 대한 경찰의 계속되는 금지통고서를 보면서 문득 원빈의 외침이 떠올랐다. ‘집회의 자유…. 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얼마만큼 하면 될까, 얼마나 줄이면 되겠냐?’6월 말의 주된 업무 중 하나는 이달 2일에 있었던 민주노총의 전국노동자대회와 관련한 수많은 집회 및 행진 신고서와 그에 대한, 또 그만큼의 ‘금지’통고서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신고된 집회 등의 내용을 모두 파
자긍심의 달(Pride Month)인 6월이 되자 모든 것에 무지개가 덮였다. 내가 다니고 있는 베를린의 한 대학교 정문에도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이 걸렸다. 자주 가는 마트에도, 길거리의 흔한 술집에도, 카페에도, 서점도, 부동산 업체의 창문에도, 화장품 가게의 제품들에도, 아시아 마트의 사케에도 무지개가 입혀졌다. 지나다 들른 대형 옷가게에서는 무지개가 그려진 특별 제품들을 내놓았다. ‘좋은 의미니까’라고 스스로 정당화하며 생각이 없던 소비를 하나둘 했다.런던에서 열리는 성소수자 축제(London Pride)에 참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