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백화점을 방문했다가 “백화점은 응답하라!”는 제목의 현수막을 보게 됐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까이 가서 읽어 보니 일방적 연장영업 폐지, 공동휴식권 보장, 정기휴점 확대, 직원용 시설환경 개선, 고객응대 근로자 매뉴얼 마련·시행 등 백화점면세점판매서비스노조의 당연한 요구사항과 함께 “본사는 권한이 없다고 한다!”는 문구가 같이 적혀 있었다.백화점과 면세점에 근무하는 판매노동자들의 대부분은 유명브랜드의 한국법인 또는 수입회사에 소속돼 있다. 하지만 많은 산업의 노동자가 직면하고 있는 원·하청 관계와 마찬가지로 근무시간과 근로
집 옥상 화단에 장미 덩굴이 사방으로 뻗쳐 커가는데, 어찌 된 일인지 여름 다 가도록 빨간 꽃 피울 기미가 보이질 않아 이상하다고 여겼다. 사람 다니는 길로 무심코 자란 가지들을 쳐내느라 땡볕에 땀 흘렸다. 잔가지를 치우다 그만 가시에 찔렸다. 피 흘렸다. 서울고등법원 정원에 자란 장미 나무에는 그래도 꽃이 달렸다. 크기도 색깔도 영 시원찮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국가손배 파기환송심 선고를 받고 나온 쌍용차 노동자들 표정을 보면서도 그랬다. 낯빛이 어두웠다. 비 한 방울 끝내 야박했던 그해 여름, 하늘에선 비 대신 최루액이 쏟아지
미군이 남한을 점령할 당시에는 구체화된 노동정책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해방 직후 번지기 시작한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에 미군정은 일정한 대책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몇몇 법령과 지침을 내렸다. 여기에서는 단결권과 단체행동상에 대해 가장 중요하게 미군정의 노동정책을 확인할 수 있는 군정법령 19호2조 ‘노무의 보호’와 군정법령 97호 ‘노동문제에 관한 공공정책(公共政策) 및 노동부 설치’에 관한 규정을 주요하게 살펴보겠다.사실상 단결 금지 정책법령 19호2조 ‘노무의 보호’해방 후 사회경제적 혼란, 노동관계 악화, 특히
지난달 15일 충북 청주 오송 지하차도 침수 참사를 놓고 예방 가능한 인재였다는 국민 공분이 높다.정권의 호위무사가 된 검찰은 사건 9일 만에 충북경찰청과 흥덕경찰서, 충북소방본부,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청, 충북도 등 5개 기관을 압수수색했다. 검찰 수사에 조선일보는 7월25일 12면에 ‘오송 부실대응 의혹 5개 기관 압수수색’이란 제목으로 건조하게 보도했다. 반면 한국일보는 같은 날 8면에 ‘오송 참사 모두 경찰 탓? … 뿔난 경찰직장협, 집단행동 예고’라는 제목의 머리기사에서 “폭우 와중에도 밤샘 교대근무하면서 최선을 다한 말단
SPC 계열사인 샤니 성남공장에서 50대 여성 작업자가 끼임 사고로 숨졌다. 반죽기계를 다루던 중, 하부 노즐을 확인하던 재해자를 미처 확인하지 못한 동료 작업자가 기계 시동 버튼을 누르면서 발생한 사고였다. 휴먼 에러에 기인한 사고라 할 수 있다.휴먼 에러는 인간이 저지른 실수가 일으킨 사고로 정의할 수 있다. 작업 절차를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거나, 잊어버렸다거나, 시간 내에 이행하지 못했다거나, 불필요한 작업을 진행해 발생한다. 당연하게도 휴먼에러가 중대재해로 이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대책 강구가 산업안전관리의 시작이라 할 수 있
“회사에서 하계휴가 시즌을 맞아 일거리가 줄어 들었다며 쉬라더니 연차휴가로 까더라고요. 이게 적법한가요?”매일같이 연차휴가 관련 상담이 쏟아진다. 주된 상담 내용은 연차휴가 산정방식과 연차휴가 사용 시기를 둘러싸고 노사 간에 벌어지는 분쟁이다.일하는 노동자에게 휴가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다. 노동은 일하는 노동자와 떼려야 뗄 수 없으며, 인간은 적절한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계속해 에너지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연차휴가 제도는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사용자로서도 노동자가 노동력을 재생산하여 생산성을 유지하게 하는
고령화 시대,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홈페이지에는 노인장기요양제도의 목적이 설명돼 있다. 고령이나 노인성 질병 때문에 일상생활이 어려운 노인에게 신체활동과 가사활동을 지원해 노후의 건강증진과 생활 안정을 도모하고 가족의 부담을 덜어 줘 국민 삶의 질을 향상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핵심은 당연히 ‘국민 삶의 질 향상’일 것이다. 장기요양에 대한 사회적·국가적 책무가 강조되는 시대라는 점도 이 설명글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장기요양에 대한 정부의 책임은 점차로
1791년 오늘(8월 22~23일), 카리브해 섬 생도맹그(Sanit-Domingue) 북부지역, 사탕수수 농장의 흑인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생도맹그는 당시 프랑스의 가장 ‘부유한’ 식민지로, 유럽의 설탕과 커피, 면화 소비량 중 절반가량을 생산하고 있었다. 매년 수 만명의 흑인 노예들이 아프리카에서 ‘수입’됐다. 약 50만명이 넘는 이들이 억압과 착취의 사슬에 묶여 플랜테이션 등에 갈아 넣어졌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의 물결은 생도맹그 흑인 노예들에게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1791년 이들의 반란은
하청업체 관리자의 갑질에 시달리던 하청업체 근로자 A는 하청업체에 시정을 요구했으나 묵살되자, 원청업체에 하청업체에 대한 감독 강화를 촉구하며 진정서를 제출했다. 하청업체는 진정서에 첨부된 업무 자료를 문제 삼고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등으로 A를 고소했다. 그러자 A는 원청업체 본사 사무실 앞에서 농성을 개시했다. 그 사이 검사는 A의 혐의가 일부 인정된다고 보고 약식기소 했고 곧 약식명령이 내려졌다. 당시 부재 중인 A를 대신해 배우자가 보충송달로 약식명령문을 받았으나 배우자는 그 사실을 곧바로 A에게 알리지 않았다. 농성을 마치고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학부모 민원에 대한 부담으로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보도가 났다. 지인 모임에 갔더니 다들 이 사건을 자기 일처럼 속상해하고 있었다. 그중 초등교사가 직업인 사람은 없었지만, 대부분 고객을 상대하는 업무를 해본 경험은 있었다. 고객의 무리한 요구나 폭언을 홀로 대응하는 게 힘들어 직업을 바꾼 사람의 이야기도 들었다. 이 사건은 사람 상대하는 일을 해본 노동자라면 누구나 겪어봤을 노동권 침해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사건 보도 이후 교사들의 폭로가 이어졌다. 학생 보호자들로부터 퇴근 후 연락이 안 되는 것에 대
일상이 비상이다. 지난해 폭우로 발생한 반지하 참사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올해는 오송 지하차도에서 참사가 일어났다. 특정한 공간으로 기억되는 참사들.그 바깥의 통계를 보자.올해는 폭우로 숨지거나 실종된 이들이 올해는 50여명, 지난해는 20여명이다. 관측 이래 최악의 폭염이었던 2018년 여름에는 4천500여명의 온열 질환자가 발생했고, 이후로도 매년 2010년대 초반보다 두 배 가까운 온열 질환자가 발생하고 있다.‘관측 이래’라는 말도 흔한 수식어가 됐다. ‘관측 이래’ 최고 기온, 최장 기간 장마, 최대 강수량, 태풍 발생
1. “정 노무사님, 지난번에 검토한 KBS 고용안정협약 체결됐나요?” 얼마 전에 회신했던 언론노조 KBS본부의 질의회신이 생각나서 담당 노무사에게 물었다.“체결 못 했어요.” 노조 요구대로 고용안정협약을 체결하면 배임이니, 뭐니 하며 시비라더니 결국 사장 등 경영진이 부담을 느껴 체결하지 못한 모양이었다.최근 윤석열 정부에서 수신료 분리징수 추진에 기존 경영진의 전면적 교체까지 예상되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KBS 노동자들은 대대적인 배치전환에 인적 구조조정까지 벌어질 것이라 우려하고 있다. 본부가 고용안정협약 체결을 사측에 요구
“계급관이 무엇입니까?”그는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 그는 내가 쓴 책을 내보였다. 중간중간 표시한 것이나 묻는 모양새로 미루어 대충 읽은 것 같지는 않았다. 책을 읽었다면 이미 어느 정도 파악했을 것으로 보였지만, 전통적 계급이론과 내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물었다.아무리 좋은 법이 있어도 그것을 운영하는 인간이 엉망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대한민국 헌법은 어떠한 계급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계급은 분명히 존재한다. 계급에 대해 말하려면 계급의 존재를 우선 인정해야 한다. 누구나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실제 그런 경우가 꽤
광복절! 빛을 되찾은 날. 국가기념일이 여럿 있지만 그중 광복절은 가슴을 뜨겁게 하는 날이다. 10월3일 개천절은 기원전 2333년 10월3일 단군이 조선을 건국한 날이라는데 그 시기에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불확실하다. 삼일절은 기미년 만세운동이 시작된 날로서 세계만방에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한 매우 뜻깊은 날이기는 하지만 어둠을 걷어내고 빛을 되찾지는 못했으니 그 감격이 광복절만 못하다.이 뜻깊고 감격스러운 날에 윤석열 대통령이 충격적인 경축사를 읽었다. 한데 일제 식민 지배의 고통에서 해방된
1.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2조와 3조 개정안이 지난 6월30일 국회 본회의에 부의된 이후 현재까지 국회는 본회의 상정 일정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야당은 8월 임시국회에서 노조법 개정안을 처리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여당인 국민의힘은 상정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국회 본회의에 상정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면서 입법 논의를 막는 국민의힘은 입법자로서의 직무를 유기하는 꼴이다.2. 노조법 2·3조 개정안은 ‘사용자’ 정의의 실질화, ‘노동쟁의’ 정의의 재정립, 쟁의행위 등에 따른 손해배상책임의 개별화를 핵심 내용으로 한다.
뉴욕타임스가 지난달 10일 스포츠부를 해체했다. 40명 안팎의 스포츠부 기자를 다른 부서로 전환배치하고 스포츠면은 지난해 인수한 자회사 ‘디애슬레틱’ 기사로 채운다. 디애슬레틱엔 400명 넘는 스포츠 기자가 하루 150개 이상의 기사를 생산한다.(한겨레 7월26일 26면 ‘NYT의 스포츠부 폐지와 저널리즘’)찬반 양론이 뜨겁지만 스포츠부 폐지는 실행됐고 독자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찬성쪽은 대충 이런 논리다. 인터넷으로 실시간 경기 정보가 유통되고 몇 시간이면 유튜버가 해설까지 곁들인 영상을 제시한다. 전문기자 40명으론 강호에 넘
가계부채의 위험신호가 점점 커지고 있다. 정부와 은행이 부동산시장 안정화와 담보물 가치를 떠받치기 위해 주택담보대출을 풀면서 가계부채 총량이 불어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형편이 어려운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연체율이 증가하면서 이른바 ‘취약차주’ 문제가 뇌관이 되고 있다.가계부채 공식통계는 한국은행에서 발표하는 분기별 ‘가계신용’ 통계가 있다. 한국은행의 자금순환표도 가계의 자산과 부채를 집계하지만 여기에는 소규모 개인사업자와 비영리단체가 포함돼 엄격한 의미의 가계부채로는 보기 어렵다. 한은의 가계신용 통계는 은행과 비은행예금취급기
최근 대중교통을 이용한 출근길에서 거의 매일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어느 순간만 되면 열차 안에 가득 찬 많은 이들의 핸드폰에서 일제히 알람이 울려댄다. 그렇게 나도 핸드폰을 꺼내 보면 오늘도 어김없이 폭염경보 재난 문자가 화면에 뜬다. 재난 문자는 가장 더운 낮 시간대 야외활동을 자제할 것을 ‘권고’하고 있지만, 지키기는 쉽지 않다. 올여름은 지난해보다 더 더운 듯하다. 매일같이 울리는 재난 문자를 받다 보니 이제는 재난 문자가 오는 게 하나의 일상이 돼버렸다. 폭염에 익숙해지는 것인지, 재난 문자에 익숙해지는 것인지 어쨌든 익숙
* 이 글은 영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올여름 극장가에서 가장 볼만한 작품은 단연코 다. 이 영화는 엄청난 규모의 대지진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이후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황궁아파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온갖 인물군상과 사건들이 한국 사회를 축소한 듯 하다.삶의 공간은 정치적이고, 어떤 결정은 그 공동체의 이데올로기를 드러낸다. 재난 이후 황궁아파트에도 중요한 의사결정의 순간이 찾아온다. 아파트 안에 함께 엉켜 살던 외부인들을 내쫓을
지난 5월, 노동위원회 구제신청 사건을 하나 맡았다. 초기 상담은 다른 사람이 했는데, 징계 수위가 ‘견책’이라고 했다. “아, 견책이요?” 난감했다. 견책은 가장 가벼운 징계다. 그러니 징계양정이 과하다는 주장은 할 수가 없다. 징계 사유 자체가 없다고 봐야, 비로소 ‘부당견책’이 된다. 그런데 이 사건의 상대방은 지방자치단체(대구 수성구)다. 구청장이 징계를 요청해서, 외부 변호사들도 여럿 들어온 인사위원회에서 징계를 결정했는데, 설마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징계를 했을까?의구심을 가지고 당사자와 노동조합을 만났다. 2020년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