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센터에서 일하지만, 행복하지 않았다고 이들은 고백했다. 주황색 나비 모양 예쁘게 새긴 작업복을 입었지만, 그 유명한 회사 직원은 아니라고 계약서는 말했다. 하청노동자, 때로는 사장이라고도 했다. 나방 처지였다. 건수 찾아 여기저기 날았다. 전봇대를 타고 옥상에 올랐다. 밤에도 휴일에도 전선을 메고 달렸다. 고객님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가차없는 '해피
광주며 화성에서 먼 길 달려온 사람들이 법원 앞에 섰다. 선고는 짧았다. 길지 않은 판결문에는 법률 용어가 가득했지만 불법파견이니 정규직 따위 단어가 그중에 선명했다. 이겼다. 옆자리 동료 손을 잡고 누군가 웃었지만 환호성은 짧았다. 굳은 표정으로 나서는 이들 앞에서 카메라 든 기자들이 방황했다. 그 자리, 웃음이 귀했다. 붕대 감은 손 가지런히 모은 채
한 무리 어버이들이 세종로 네거리 옆 인도에 모였다. 왼쪽 가슴에 손 얹고 국기 앞에 맹세했다. 모자 쓴 참전용사는 거수경례를 잊지 않았다. 클라우드컴퓨팅법이며 원격의료법 따위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을 읊었다. 주옥같았다. 주름진 목에 핏대 높이 솟았다. 세월호 특별법 때문이라고 했다. 유가족 선동세력은 지옥 가라고 호통쳤다. 가사 장삼 차림 승려가 팻말
오후 두 시, 사이렌이 요란스레 울었다. 차가 멈췄고 사람이 섰다. 군용차가 세종로 텅 빈 도로를 내달렸다. 민방위 깃발이 바람에 날렸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훈련이라고 사전은 풀이했다. 오후 세 시, 농성하던 유민이 아빠가 천막을 나섰다. 청와대를 향했다. 경찰 무전기가 곳곳에서 요란스레 울었다. 구급차가 느릿느릿 걸음 맞춰 따라붙었다. 봉
광화문광장 우뚝 선 이순신 장군 동상은 이정표다. 그 앞 분수는 물놀이 명소다. 아이들은 물 만나 더없이 명랑했다. 그 앞자리 천막에서 아빠가 하염없이 말라 갔다. 명을 건 싸움이었다. 명을 다 살지 못한 딸과의 약속이었다. 참사의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애초 가만히 있으라고 누군가 명했다. 사람들은 항명했다. 서명을 받았다. 다 같이 굶었다. 저마다의 사명
더위 속 광장에 분수가 솟았고 아이들이 놀았다. 멀찍이 선 엄마들이 스마트폰 들어 사진을 찍었고, 종종 소리쳤다. 넘어질까, 부딪힐까 물가에 아이 내어 둔 엄마 목소리는 다급했다. 마냥 신 난 아이가 젖은 몸으로 한 번씩 엄마 품을 찾아들었다. 그 앞 천막에서 곡기 끊어 말라가던 아빠가 그 모습을 지켜봤다. 여행에 마냥 들떴던 아이는 젖은 몸으로 아빠 품을
파업투쟁 나선 비정규 노동자들이 서울 양재동 자동차회사 앞길에 앉았다. 햇볕이 낮게 들어 모자챙은 눈을 겨우 가리는 데 그쳤다. 나무 그늘은 야박했다. 한낮 열기를 품은 아스팔트는 끈적거렸다. 얼음물은 금방 녹았다. 차별에 맞선 싸움 앞에 더위는 공평했다. 1천500도가 넘는 쇳물을 다루지만 33도 여름 더위가 쉽지 않다. 피서는 누구나의 바람이다. 시원한
무명옷 차림 노인이 새 신을 신느라 허리 굽어 바빴다. 짚신은 난생처음. 짚자리 깔고 거듭 절했다. 도끼 한 자루 앞자리 두고 꿇어앉아 호소했다. 신신당부였다. 이른바 '도끼 상소'였다. 기초연금은 약속이었다. 선거가 끝났으니 헌신짝 신세였다. 가난한 노인은 낡은 짚신짝 처지였다. 짚신 삼던 시절은 지났다. 잘 벼린 도끼 앞자리 두고 상소에 목숨 걸던 것도
줄지어 선 사람들이 투표 차례를 기다렸다. 찬반을 묻는 자리였다. 찬성은 집에 가는 것이라고 앞서 사회자는 설명했다. 찬밥 말고 따뜻한 집 밥이라고 누군가 보탰다. 찬 바닥 농성 40여일. 도시락은 오늘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천장 없는 잠자리는 이제 익숙했지만, 돌아갈 곳이 이들에게도 있었다. 서초동 어느 높다란 빌딩 앞길 검은 아스팔트에 앉아 흰색 종이
저 삼선 실내화는 물에 젖어 질꺽거렸다. 지난밤 천둥과 번개가 요란했고 소나기 오래도록 퍼부었다. 돌침대 삼았던 아스팔트엔 물이 고였다. 배낭과 침낭까지 한 짐 지고 사람들은 앉지 못해 서성거렸다. 노숙농성은 한 달이 가까웠다. 제집인 양 서초동 빌딩 숲길을 헤맸다. 해 지면 잠을 청했고, 해 뜨면 길을 나섰다. 일찍이 본 적 없는 대규모 도심 노숙농성이라
광화문 네거리, 고풍스러운 미술관 옆 길은 특별할 것도 없어 그냥 뚫린 길이다. 오징어구이 파는 노점상 수레 옆으로 정장 입은 사람이 바삐 지났다. 외국 말 쓰는 관광객이, 유모차 앞세운 엄마가 거길 지나 광장 분수대로 향했다. 젊은 연인은 손잡고 보폭 맞춰 한 몸처럼 그 길을 걸었다. 지나가지 못할 이유란 없었으니 시민들은 통행금지 따위 옛말을 떠올릴 필
상복 입은 이들이 앞줄에서 절했다. 삼성 마크가 새겨진 티셔츠 입은 사람들 여럿이 뒷줄에서 따랐다. 가사 장삼 입은 스님이 옆자리 함께했다. 절 한 번에 염주 알 하나를 실에 뀄다. 108번을 엎드렸다. 먼저 간 동료의 넋을 기렸고, 노동조건 개선을 기원했다. 27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 대웅전 앞이다.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조합원들은 이날 조계종 총무
주말 청계천 물가 좁은 광장에 남녀노소가 머물렀다. 가족이 함께했다. 누구나가 숨죽였다. 미간을 찡그렸다. 벌겋게 충혈된 눈을 해서 자릴 지켰다. 호소가 있었다. 잊지 말아 달라, 그것은 재차 유족의 말이었다. 화답이 따랐다. 촛불 올랐다. 진도 앞바다에 머문 아이들의 이름을 함께 불렀다. 집회는 짧았다. 행진 줄이 길었다. 목말 탄 아이가 앞선 촛불을 바
피에로가 내내 웃는다. 그 속은 모를 일이다. 기자회견 앞자리 앉아 쉬던 청년은 그 차림새 값을 치렀다. 카메라가 많았다. 모델 노릇 하느라 진땀을 뺐다. 훌쩍 여름 날씨였다. 슬쩍 가면 올리고 땀을 훔쳤다. 유명한 햄버거 가게 앞이다. 매출 1위, 간판이 화려한 곳이다. 열악한 노동조건과 저임금에 노동자는 골병들었다니 그 속은 또 모를 일이다. 가면 쓰지
가만히 있으라. 나라님 말씀이 민심과 달라 서로 통하지 않으니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 있어도 결국 제 뜻을 펼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가만있지 않겠다며 청년들 나서 저기 올랐다. 박근혜는 물러가라고 현수막에 적었다. 노란색 종이에 생각 담아 뿌렸다. 오르지 마라. 그곳은 금지된 곳이었기에 경찰이 뛰었다. 진압이 빨랐다. 시위는 짧았다. 물러가라,
28일 오후 서울광장에 마련된 세월호 침몰사고 희생자 합동 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이 조문을 마치고 나오고 있다. 서울시는 조문객을 받기 시작한 27일 오후 3시부터 이날 오전 11시까지 7천여명이 방문했다고 밝혔다. 서울시를 비롯한 16개 시청과 도청 소재지에 합동분향소가 차려졌다.
진도 팽목항에 사람이 많았다. 카메라와 천막과 경찰 버스와 구급차가 또 많았다. 줄지어 선 장의차가 차례를 기다렸고 유족 긴급후송 딱지 붙인 택시 줄이 뒤따라 길었다. 죄인이 거기 많았다. 자식 앞세운 죄, 살아남은 죄라고 사람들은 고백했다. 유배지의 하루가 틀림없이 저물었다. 노랗고 붉고 푸른 빛을 하늘에 남겼다. 바다는 그 빛을 다 품어 고왔다. 물결은
단체 율동의 핵심은 눈치다. 우물쭈물 박자 못 타고 헤매다가도 손 쭉 뻗어 찌르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면 절반은 간다. 웃는 표정 내내 유지한다면 더욱 좋다. 앞자리 고정이다. 박수와 환호가 따를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건 무대에 설 용기다. 자신감이다. 수천의 사람 앞이라면 더욱 그렇다. 잘 안 돼도 신 나게 흔들다 보면 하는 이, 보는 이 모두가 즐
기자회견 자리에 방송 카메라 한 대 보이질 않았다. 거기 대신 무전기 들고 분주한 경찰이 많았다. 커다란 펼침막엔 누구라도 알 만한 사람의 얼굴과 누군지도 모를 이의 영정이 줄줄이 선명했다. 사선을 넘은 이들도 한때 자랑스러워했을 회사 로고가 그 뒤로 보였다. 삼성을 넘겠다고 선언한 이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옆자리 섰다. 그곳에 오래도록 노조는 금기였다. 눈
가만 보니 낯익은 얼굴, 홍종인 금속노조 유성기업 아산지회장이다. 또 가만 보니 낯선 모습,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홍종인씨다. 그는 자주, 또 오래 높고 비좁은 자리 올라 바빴다. 공장 근처 굴다리 움막에 들어 151일을 보냈으며, 충북 옥천 22미터 높이 광고탑에 올라 129일을 버텼다. 노조 탄압에 항의했다. 경영진의 불법행위 처벌을 요구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