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개 노동·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4·14 기후정의파업조직위원회에 참여한 3천여명의 시민들이 14일 오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인근에서 집회를 열고 에너지 공공성 강화로 에너지 수요 대폭 감축, 에너지 기업들의 초과 이윤 환수 및 탈석탄·탈핵 추진, 신공항·케이블카·산악열차 건설 추진 중단 등 6대 핵심 요구를 외쳤다. 집회를 마친 이들은 산업통상자원부를 거쳐 환경부 청사까지 행진한 뒤 해산했다. 기후위기를 멈추기 위해 움직인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학교에서 밥 짓던 사람 여럿이 아팠다. 우연이 아니다. 커다란 튀김 솥 앞에서 가자미를, 돈까스를 튀겨 내던 그들은 자욱한 연기 속에서도 숨쉬기를 멈출 수가 없어 폐를 혹사했다. 쌀 포대와 업소용 식용유와 양파·당근 자루를 나르고 칼질하느라 근육과 관절을 갈아 냈다. 아이들 밥 짓는 일을, 또 밥벌이를 멈출 수가 없어 견딘 시간은 독으로 남았다. 일하다 아프거나 죽지 않게 하자는 뻔한 말을 하느라 길에 서고, 소리치고,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쏟아야만 했던 사람들은 서로 무척 가까웠다. 언니, 동생, 친구, 동료였고 동지였다. 그들
흔들린 사진은 첫 번째로 거른다. 초점이 맞지 않아도 그렇다. 망친 사진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빠르게 대응해 쓸 만한 장면을 기어코 챙겨야 하는 것이 사진기자의 숙명인데, 밥벌이 사진 훌쩍 이십 년 가까운 나는 여태 허둥댄다. 초점 검출 속도가 충분히 빠르지 않은 낡은 카메라 탓을 해 보지만 무상하다. 늙은 몸뚱이 탓도 그럴싸하지 않다. 몇 장면 망치고, 놓쳤대도 흔들리지 않는 뻔뻔한 ‘멘털’만이 나날이 단단해진다. 변명 늘어놓는 솜씨가 는다. 그런 걸 자기합리화라고 부르는 것 같다. 고용노동부 장관은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던
골목길 혹은 대로변 해 잘 드는 곳이면 툭툭 꽃망울 터지기 시작해 겨울 다 지나 겨우 봄이다. 군데군데 노란 꽃잎 보며 사람들 설레는 때다. 흐드러져 마냥 이쁠 때도 아니니, 그저 기특한 것이다. 부지런 떨어 조금 앞선 것들의 힘이다. 무채색의 거리에 점점이 구멍을 낸다. 꽃샘이라고 아직은 찬바람 부는 길에 온기를 더한다. 맘 편히 쉬는 날, 꽃놀이 나설 생각에 발코니 구석 선반에 올려 둔 돗자리에 묵은 먼지를 턴다. 자전거 안장을 괜히 한번 닦는다. 엄두가 나질 않아 대청소는 며칠 더 미룬다. 노조 사무실 있는 건물 앞에도 개나리
언젠가 아들 자취방 찾아오던 엄마 양손엔 장바구니와 커다란 보자기가 묵직했다. 배추김치, 무김치와 멸치볶음, 오래 끓여 뽀얀 곰국이 거기 가득했다. 전철 타고 두 시간을 왔다는 얘길 듣고 나는 버럭 화를 내고 말았지만, 그날 밥이 참 꿀맛이라 두 공기를 뚝딱 비우고 웃었다. 온갖 집안 살림과 남편 자식 먹여 살리는 데 한 치 부족함이 없던 엄마는 밖에 나가 일 하는 걸 멈춘 적도 없었다. 공장 식당에서 주야 맞교대로 밥을 짓고, 빌딩 구석구석을 쓸고 닦았다. 억척스러웠다. 다 늙어 여기저기 삐걱대던 엄마가 어느 날 이제는 힘들다며
언젠가 사람 들고 난 자리에 화분이 빼곡해 숲을 이룬다. 사람을 거른다. 이 선을 넘지 마시오, 대놓고 말하던 폴리스라인보다 세련됐지만, 그 말뜻이 다름없다. 아우성 넘쳤던 어디든 화분이 놓였다. 추운 날엔 사철 푸른 나무가, 따뜻한 날이면 빨갛고 노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영정 들고 행진 나선 이태원 참사 유가족이 눈물을 예고한 광화문광장에도, 향냄새 끊이질 않던 대한문 앞 쌍용차 희생자 분향소 있던 자리에도 어김없이 화분이, 또 화단이 들어섰다. 사람들은 차마 화분을 밟지 못하고 선 자리에서 꺽꺽 울었다. 자리를 잡지 못한
지하철 첫 차 타고 시청 앞 분향소 나온 아빠가 구호 적은 선전물을 고쳐 다느라 바쁘다. 바람 때문이다. 구겨지고 찢어진 데가 많았다. 참, 초라하다고 아빠가 말했다. 이어 어느 정치인의 눈물과 약속과 거짓에 대해 비나리 하듯 읊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목에 목도리가 붉었다. 칼도 없이 이 악물고 테이프를 떼어 낸다. 강릉에서 열차 타고 온 아빠를 반갑게 맞이한다. 헌화 마치고 돌아서는 시민에 꾸벅 인사를 건넨다. 장갑도 없이 국화 서너 송이 들고 한쪽에 가만 선 아빠와도 눈인사 나눈다. 한 번씩, 영정 아래 쌓인 국화를 정돈
내복에 두꺼운 점퍼를 벗지 못하고 산다. 길에서 바들바들 떨었던 기억 탓이다. 칼날 같던 바람이 어느새 산들산들, 훌쩍 창밖으로 봄기운 스민다. 습관처럼 껴입은 나는 별 수도 없이 땀 흘린다. 그제야 봄 가까운 줄을 안다. 청소해야지, 이불을 빨아야지, 내 맘속 묵은 때도 좀 털어야지, 새 봄 맞이 계획을 세워 볼 만한 때다. 봄볕 소중한 줄을, 겨울 혹독하게 겪은 사람이 안다. 저기 병원 청소노동자는 인터뷰 기다리는 그 시간을 그냥 보내질 못하고 틈틈이, 꼼꼼히 걸레질한다. 창가에 가지런히 둔 화분을 제집 것인 양 살뜰히 살핀다.
설, 엄마 집은 추웠다. 여태 철없는 막내는 춥다 춥다 노래를 불렀고, 더 늙은 엄마는 안 춥다 괜찮다 대꾸했다. 등유 한 드럼에 얼만지 아느냐며 한숨 쉬었다. 마루 한구석 전기장판 깔린 자리에 다 큰 자식 손주들이 오밀조밀 모여 앉아 귤을 까먹었다. 아궁이에 나무 때는 온돌방이 하나 있어 종종 등을 지질 수 있었다. 참기름은 한 방울만 넣어도 충분하다고, 옛날부터 엄마 잔소리가 대단했다. 많이 넣어도 맛있다는 걸 다 커서 알았다. 나는 온 집에 불을 켜고 다녔고, 엄마는 따라다니면서 불을 껐다. 엄마 매서운 손바닥이 날아와 내 등
CJ대한통운 원청의 교섭 의무를 확인한 판결이 나온 날, 예정한 기자회견 시각에 맞춰 현장에 도착한 사진기자 여럿이 허둥댔다. 회견은 진작에 끝났다. 그림으로 담기 좋은 만세삼창도, 서로 안고 좋아하는 모습도 지나갔다. 1년6개월을 기다린 판결이 예상보다 일찍 끝난 탓이다. 앙코르 요청에 한 번 더 현수막을 펴고 선 사람들이 재차 만세 삼창했다. 처음보다 굳은 표정이었지만, 두 번이라고 못 할 일도 아니었으니 대체로 자연스러웠다. 미리 준비했을 두 개의 현수막 중 나머지 하나를 펼 일이 없었으니 그럴 만했다. 진짜 사장을 찾아 묻는
한여름 달궈진 쇳덩이 위에 0.3평 철창 짓고 버텨 조선소 하청노동자 현실을 알린 그는 한겨울 얼어붙은 돌바닥 위 검은색 롱패딩 안에 겨우 들어 노조법 개정을 말한다. 밥을 굶어 소리 키운다. 이대로 살 수는 없지 않겠냐고 물었던 그는 지난겨울, 더는 이렇게 죽어 갈 수는 없다면서 울며 밥 굶던 산재 유가족의 자리에 섰다. 죽으라고 내모는 수백억원 손해배상 칼날을 막느라 칼바람을 맞는다. 헌법이 보장한 노조할 권리를 말하느라 배 짓던 그는 얼음 감옥에 들었다. 송곳처럼 뾰족한 빙산의 일각이다. 겨울, 국회 앞 빼곡하게 어깨 맞댄 천
국회 앞에 농성 천막 빼곡하니, 비로소 겨울이다. 거기 온갖 집회와 행진이 많아 시끌벅적하니, 연말이다. 무성하던 잎 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처럼 삐쩍 말라 가는 사람들이 둥그런 돔 가까운 곳에서 터덜터덜 기운 없는 발걸음을 옮기는 때가 바로 겨울이고, 연말이다. 밥보다 법이 급하다고 여긴 사람들이 가슴팍에 일력을 달고 하루하루를 찢는다. 노조법 개정을 따뜻한 잠자리보다 밥이 중하다고 여긴 사람들이 가슴팍에 핫팩을 끼고 누에고치처럼 실을 짜 그 안에 든다. 밥 짓다 죽지 않겠다고, 급식실 인력 확충과 복지수당 차별철폐를
춥던 날. 잔뜩 껴입은 사람들이 법정 문을 나서는데, 그 표정을 읽느라 사진기자들이 바빴다. 유독 눈 붉은 사람이 있어 찰칵. 아차, 그는 배 짓는 사람이다. 남의 일에 울었다. 구석에 비켜서서 슬쩍 눈물 훔치는 사람도 보여 찰칵. 그가 자동차 만드는 사람이다. 13년 오랜 기다림 끝에 울었다.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헌법 27조3항은 말한다. 믿는 사람이 없다. 그동안 죽어 간 사람이 많다. 국가 손해배상액 30억원이라고 적은 종이를 잘게 찢어 하늘로 뿌리고 나서야 그들은 웃었다. 여러 번 부둥켜안았다. 어깨 겯고 투쟁
바퀴 굴려 밥 버는 일이 굴레다. 한 푼이 아쉬운 게 부자 아닌 사람들의 숙명이니 그건 쉬이 멈출 수도 없는 것이었다. 차곡차곡 졸음을 번다. 필연 사고가 잦다. 화물차의 졸음운전 때문이었다고, 고속도로 위 수없는 사고의 원인을 진작에 규명했지만, 대책을 세우는 일에는 주춤거리는 동안 사고가 멈추지 않는다. 막을 수 있는 일이었다고 사람들이 말한다. 그러니 참사로 여긴다. 먹는 일을 멈출 수도 없어 바퀴가 멈추질 않는다. 돌고 돈다. 밤새워 돈다. 갈 길이 멀고 멀다. 그러니 안전이 멀고 멀다. 한 날 화물차들이 줄줄이 섰다. 이들
겨울 앞 새로 꺼낸 두꺼운 솜이불 두 채를 빨아야 했다. 작은 집 살림에 욱여넣은 세탁기로는 어림도 없어 동네 빨래방을 이용했는데, 돌아오는 길이 문제였다. 탈수했는데도 물 잔뜩 머금은 이불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팔이 뻐근했다. 빨랫줄에 널기도 쉽지 않았다. 물이 참 무겁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비 오던 주말 서울 태평로에서 떠오르지 않던 대형 현수막이 떠올랐다. ‘노동개악 저지’ 구호 담은 그것은 빗물 잔뜩 머금어 무거웠던지, 커다란 풍선 네 개로도 꼼짝을 안 했다. 여러 사람의 노력에도 끝내 높이 솟지 못한 채 거기 모인 사람
한때 온갖 초록빛 작물로 발 디딜 틈 없던 저기 밭이 휑하다. 미처 거두지 못한 무, 배추 얼마간이 남았다. 새로 심은 어린 마늘과 양파가 밭고랑 한쪽을 채웠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마당에서 노랗고 붉게 피어 흐드러진 온갖 꽃나무들은 진작에 비닐하우스 안 특별한 온실로 들어갔다. 겨울 앞이다. 주위 많은 것들이 색을 잃어 간다. 아빠 팔순을 맞아서 모였으니 가족사진을 찍기로 했다. 공들여 일군 그 밭에 늙은 부부를 위한 작은 벤치를 가져다 뒀다. 풍산개 복슬이가 모여든 사람들을 반긴다. 찰칵, 화목이 꽉 들어찬 그 사진 속 사람들은
나뭇잎 하나둘 노랗고 붉어 어디든 가을은 참 예쁘다. 맑은 볕 품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보고 있자면 속에서 들끓던 온갖 미운 감정도 바스락 부스러지는 모양이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손잡고 그 길을 걷고 싶어지는 것이다. 잘 맞는 편한 신발 신고 어디든 길을 나서고픈 마음이 샘솟는 것이다. 가을은 참 예쁘다. 주야간 쉼 없이 돌아가는 빵 공장 앞길에도, 서울 강남땅 어느 높다란 본사 빌딩 앞 거리에도 틀림없이 가을이 찾아온다. 사람들이 찾아온다. 시퍼렇게 맑은 하늘 먼 곳을 살피던 사람들 눈이 시큰거린다. 질끈 감은 눈꼬리가 젖
국정감사 시작하던 날, 저기 자동차 와이퍼 만드는 노동자가 푸른 수의에 가면 쓰고 정부세종청사 고용노동부 정문 앞에 앉았다. 목소리 내내 높였다. 그 앞 지나는 국회의원들이, 또 기자가 보고 한 번 보고 묻고 찍기를 바랐다. 바람에 그쳤다. 애써 준비한 보람이 적었다. 눈에 띄기를, 말이 돌기를 바라는 일이 대개 그렇다. 지나던 카메라를 무척이나 반긴 이유다. 저 가면의 주인공은 인근 식당에서 국수 한 젓가락을 뜨던 참이었다. 전화받고 한달음에 달려 왔다. 노동부 건물을 무대 삼아 상황극을 선보였다. 외국자본의 먹튀 행각을 꼬집었다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가 25일 오후 국회 인근에서 ‘안전운임 일몰제 폐지! 차종-품목 확대! 후퇴 없는 법안 통과 촉구!’ 3차 위험물운송 화물노동자 결의대회를 하고 있다.
언젠가 바람 많이 부는 선착장 앞에서 함께한 벗들과 단체사진을 찍었다. 얇은 티셔츠가 몸에 딱 붙어 배 불룩 볼품없는 내 몸매가 사진 속에서 적나라했다. 세상 환하게 웃던 표정이, 또 엉거주춤 우스꽝스러운 포즈까지 완벽한 이른바 굴욕 사진이었다. 나도 벗들도 그 사진을 보며 빵 터져 한바탕 웃고 말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사진 찍힐 때마다 그 일이 생각난다. 표정과 옷매무새를 자꾸 신경 쓰게 된다. 망가진 제 모습이 사진에 담기길 바라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니 여름철 땀 범벅에 얼굴빛 벌건 주변 사람 모습이나 화난 표정, 넘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