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동을 지나 한 해가 다시 저물어 간다. 산적한 일들을 가늠하자면 아침에 깨어나 몸을 일으키기조차 두렵다. 겨우 일으킨 몸과 마음은 거리에 나서 겨울바람을 마주하기 전부터 시리고도 둔탁하다. 어렵고 어지러운 때, 달력에 빼곡하게 적힌 일정들 사이에 드물게도 반가운 시간이 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 말하고, 알고 있다 여기는 것을 되묻고, 토론하고, 함께 답을 찾아가는 일에 오래도록 게을렀다. 일주일에 하루, 짧게나마 묻고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과 마음을 열어 두고 보내는 시간이 무척 소중하다.매주 수요일 오후, 지역 활동가들과 ‘현장
그녀는 2019년부터 현대해상의 자회사 현대C&R 콜센터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2020년부터 코로나19로 비대면 금융거래가 늘어나면서 콜센터로 업무가 집중되고 노동강도는 더욱 높아졌다.콜센터 노동자들이 온갖 고통을 감내하며 비대면 상담을 받아 온 그 길고 어두웠던 코로나19의 터널을 지나자, 금융권은 코로나19 이후 증가한 이익으로 성과급 잔치를 벌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4년을 넘게 회사를 다녔지만 그녀는 몰랐다. 현대해상이 해마다 경영성과급을 모회사 정규직 및 자회사 사무직 노동자에게만 지급해 왔다는 사실을. 올해에도 현대해상은
‘굳이 사회나 공동체 걱정은 하고 싶지도 않아.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걸.’ 이따금 평범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또래 친구들과 얘기하다 보면 듣게 되는 말들이다. 2023년을 살고 있는 청년 입장에서 미래에 대한 별다른 기대를 안 하는 것이 사실이다. 학창 시절 내내 경쟁하고, 취업하느라 경쟁하고, 직장에서도 경쟁하느라 지쳤다. 이 나라에서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는 먹고사느라, 내 몸 하나 쉴 집 하나 챙기기 바쁘다. 사회에 대한 걱정은 사치라고 생각한다. 사회공동체에 관한 논의는 ‘먹고살기즘’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문제 해
1. 노란봉투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됐다는 걸 포털뉴스에서 읽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수준의 기사였다. 재계 관계자를 인용해서 보도했는데 노란봉투법이 시행되면 이 나라는 노조 파업으로 기업이 망하고 국민경제가 절단 나는 일만 남는 거였다. 그야말로 노란봉투법으로 대한민국은 기업하기 어려운 나라가 됐다는 거였다. 재벌이 소유한 경제지만이 아니었다. 몇몇 진보언론을 제외하고는 온통 그런 식으로 보도했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염두에 두고 쓴 것으로 보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시끄럽게 여론
그날의 비극은 사측의 무분별한 정리해고에서 시작됐다. 2002년 한진중공업은 1조6천억원의 매출과 240억원의 당기순이익을 냈다. 그러나 사측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이익을 위해 650명 노동자를 일방적으로 해고했다. 이에 노조는 크게 반발했고 파업으로 대응했다. 파업으로 막대한 손해를 봤다며 사측은 노조간부들을 상대로 약 7억원의 손해배상 및 가압류를 신청했다. 당시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장이던 김주익도 손배·가압류 대상에 포함됐다. 김주익은 곧바로 크레인에 올라 고공농성을 펼쳤다. 한진중공업은 7억원에서 150억원으로
지난 주말 서울 서대문 네거리와 여의도 광장에서 두 개의 노동자대회가 있었다. 하나는 민주노총이 주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노총이 주최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왜 날씨도 쌀쌀한 이 때에 노동자대회를 갖는가? 53년 전 11월13일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앞길에서 분신 항거한 전태일 동지의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필자는 전태일 정신이 지금 노동운동 속에서 올곧게 계승되고 있다고 자신하지 못한다. 53년 전 전태일 동지의 죽음을 접하고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투쟁했던, 투쟁
“그동안 사각지대로 생각했다”프리랜서 인터뷰에 참가했던 청년유니온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랜서를 사각지대 존재로 표현하면서 프리랜서의 자부심이나 긍정적 측면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아닌가를 성찰했다. 인터뷰에 참가한 프리랜서들이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프리랜서를 지칭하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는 그의 지적에 공감했다.일하는 시민을 비천하게 보는가, 이데올로기에 휩싸여 특권을 부여하는가, 동료시민으로 존중하는가에 따라 노동을 향한 언어가 달라진다. 프리랜서를 사각지대로 보는 것은 노동법을 적용받지 못하는
변호사는 사건의 승패를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의뢰인에게 유·불리를 설명해 줘야 한다는 게 내 신념 중 하나다. 그러다 보면 화를 내는 의뢰인이 가끔 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저놈들이 나쁜데 왜 제가 질 수도 있다는 거예요? 판사님이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럼 나는 또 설명을 한다. “법은 항상 착한 사람 편인 게 아니고요, 판사는 선이 아니라 법에 따라 판단합니다.”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심판한다(대한민국헌법 103조). ‘헌법과 법률’은 일단은 ‘현실에 있는 법’, 즉 ‘실정법’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정법 외
2023년 하반기를 마주하는 지금, 다양한 영역에서 애쓰는 활동가들과 함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현재 민주노총 임원선거가 진행 중이다. 선전물에 반윤석열 전선의 선봉대가 되겠다는 슬로건이 많이 보인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각자의 현장과 위치에서 정말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난 모든 시간이 그랬다.운동 그리고 활동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과 현장의 시민들과 호흡하며 문제를 발굴하고 제기하며 변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도하게 정치화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흥분으로만 가득한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8일 정부 서울청사에서 열린 비상경제장관회의에서 야당 단독으로 국회 본회의에 상정하려는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이 “헌법과 민법 위배 소지가 클 뿐 아니라, 그간 애써 쌓아 온 우리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경제부총리가 마치 노사관계 전문가처럼 말하는 장면은 해방 이후 70년 동안 반복돼 왔다.윤석열 대통령도 최근 “내년부터 50인 미만 사업장까지 확대 적용되는 중대재해처벌법 때문에 기업들이 두려워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당은 대통령에 발
우리 사회가 빠르게 분열되고 있다. 사전적 의미 그대로 집단이나 단체, 사상 따위가 갈라져 나뉘고 있다. 스스로 분열하기도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의 분열은 외부의 충격과 영향을 받아 분열되는 상황이다. 정치·세대·젠더·지역·공동체·노동 등 분열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정치 분열은 정치적 사상과 환경 등에 따라 이미 오래전부터 나타났고, 세대와 젠더는 지난 대선 이후 더 빠르게 분열될 것으로 이미 예견된 바 있다. 노동은 노동조합이 그나마 지키고 있지만, 최근에는 노동조합마저 분열시키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분열이 잘못된 가
우리나라 헌법 6조1항은 “헌법에 의해 체결·공포된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고 돼 있다. 그동안 무심하게 지나치던 이 조항이 내게 완전히 다른 무게를 갖게 된 것은 지난 2021년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비준에 이르러서였다. 그 해에 우리나라는 ILO 기본협약 중 87·98·29호 협약을 비준했고, 기탁일로부터 1년이 지난 2022년 4월20일께 효력이 발생하였다. 그런데 어떤 효력인가? 헌법 6조1항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이제 비준된 위 ILO 기본협약은 국
단풍이 물들어 가는 늦가을, 조만간 단풍이 지듯이 이 계절 또한 지나가리라.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을 나오면 길가에는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주말인데도 정동길은 오고 가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이러한 서울의 중심 한가운데를 산책을 하며 즐겁고 여유로운 상념에 잠기고자 하나, 이미 내 머릿속은 다른 상념으로 채워져 가고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 근대 역사의 중심지이지만, 내 일터이기도 하기에 그렇다.법은 과연 정의로운 것일까? 대체로 아니라고 답변할 것이다. 그렇지만 법이 추구해야 하는 가치는 정의의 실현일 것이다. 이러한 법을 만
1. “체결된 단체협약을 무효로 할 수 없겠냐.” 기아차 아무개에게서 전화 연락이 왔다면서 전달받은 질문이다. 나는 무슨 말인가 했다. 체결 권한을 가진 위원장이 사용자와 체결한 단협인데, 거기에 금속노조 기아차지부는 조합원 찬반투표까지 거쳐 한 것일 텐데 무효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질문인가 싶었다. 어쨌거나 한동안 뜸했는데 뭔가 시끄러운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기아차 노조간부가 입찰업체들과 짜고 조합원 티셔츠값을 부풀려 뒷돈을 챙겨서 구속됐다는데요. 현장에서는 이것 말고도 이런저런 말들이 떠돌고 있다네요.” 사무국장이 전해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을 위한 종합예술단 봄날의 공연에 우연히 참석했다. 영등포 산업선교회의 공연장은 소박했지만, ‘돈이 아무리 좋아도 사람은 죽지 않아야 한다’는 노랫말은 울림이 있었다. 위로와 연대가 필요한 현장을 찾고자 각계 시민이 매주 연습으로 만든 하모니는 아름다웠다. 영등포구 시민을 비롯해 머리가 허연 어르신 관객도 인상적이었다. 문득 우리 정당은 시민에게 어떤 경험과 세계를 제공하나 싶어 복잡한 상념이 스쳤다.현대 민주주의에서 정당은 시민의 생활세계를 구축한다. 정당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당에서 운영하는 보육시설
일제에 의해 이식된 자본주의 덕분에 조선에서 노동자운동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1920년 4월 조선노동공제회, 그해 5월 노동대회, 1922년 조선노동연맹회,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 1925년 조선공산당, 1927년 조선노동총동맹이 결성됐다.1930년대 일제는 군국주의로 내달렸고, 국민총동원에 기반한 전시경제체제를 수립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노동문제는 본격적으로 조선총독부의 국가보안(state security) 문제로 취급됐다. 민족해방과 노동해방을 동시에 지향했던 조선의 노동운동은 공산주의로 간주됐다. 노동문제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2·3조 개정안(노란봉투법)은 2023년 2월21일 소관 상임위원회인 환경노동위원회를 통과했지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60일 이상 계류됐다. 5월24일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등 야당은 환경노동위원회 재적위원 5분의 3이상의 찬성으로 본회의 직회부 요구안을 단독으로 의결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달 26일
남전노조 쟁의1953년 2월부터 신현수·김경호 등이 노조 조직에 착수했으나 남전 사장 박만서가 노조결성을 반대하고 조직준비에 가담한 종업원들을 박해하고 신현수 등을 파면하자 남전노조준비위원회는 1955년 2월19일 남전노조를 결성했다. 노조는 부당하게 해고당한 노조임원 4명에 대한 해고철회와 부당노동행위 중지를 요구한다.남전노조 쟁의는 사용자가 노조결성에 반대하고 노조를 결성하려는 근로자를 해고한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사용자의 지속적인 노조설립 방해공작과 부당노동행위로 쟁의가 확산했다. 따라서 남전노조 쟁의는 사용자의 노조설립 방해
윤석열 정부는 김승희 전 대통령실 비서관의 딸 학교폭력 논란이 불거지자 7시간 만에 경질했다며 봐주기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비리 논란이 불거진 공직자 처리 방식 가운데 가장 손쉬운 게 경질이다. 그러나 이는 하수 중에도 최하수다. 잘라 버리면 모든 게 끝나는 줄 알지만, 모래에 머리 처박은 타조 꼴이다.최근 한국과학창의재단과 그곳 직원이었던 과학 유튜버 ‘궤도’(본명 김재혁)가 논란의 중심에 선 공직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당사자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가장 훌륭한 모범을 보여줬다. 구독자 93만명을 보유한 유튜버 궤도는
프레스 기계를 담당하는 노동자가 기계에 손등이 벗겨져 산재신청을 하러 왔다. 소재 철판 등에 압력을 가해 가공하는 프레스 기계에는 정상적이라면 인체 감지 센서를 달아야 한다. 작업자의 신체가 감지되면 기계의 가동이 중단되는 방식으로 작업자의 안전을 보호하는 것이다.재해 노동자는 “안전 센서를 작동시키면 작업량이 크게 줄어 보통은 꺼 놓는다”고 했다. 위험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는 “회사에서 생산량을 쪼는데 어쩔 수 없다”고 답했다. 이처럼 일터에서는 작업의 효율성이 노동자의 안전에 우선한다. 노동자 개인이 조심해서 해결될 수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