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아이돌 가수 앞에 선 소녀처럼 언니는 두 손 모아 바라고 섰다. 노조 사람한테서 노동청장 면담 결과를 전해 듣는데 웃음이 빵 터졌다. 청사에 들어가 큰소리 뻥뻥 치고 나온 뒤다. 진정서에 사연과 바람과 원청이며 하청회사 주소 따위 꾹꾹 눌러 적는데 질서를 지키라고 누가 뭐라기에, 법을 지키라고, 불법을 가만두냐고 또박또박 따져 물었다. 꾹 참고 오
살얼음 낀 돌바닥에 미끄러지듯 엎어져 사람 꼴을 바닥에 새긴다. 흰옷이며 노조 조끼엔 땅의 흔적을 새긴다. 땀 흘린다. 입김 토해 가며 꾸역꾸역 나아간다. 죽비 소리를 따랐다. 팻말 든 사람들이 뒤따랐다. 비릿한 돌바닥 냄새를 맡으며 얼굴이 차차 붉었다. 눈 녹아 젖은 바닥 걱정에 껴입은 우비가 금세 번거로웠다. 돌아보니 어느새 멀리도 왔다. 4천300여일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비정규직대책한국교회연대·대한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 소속 종교인들이 KTX 해고승무원과 함께 19일 KTX 승무원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서울역에서 청와대 방향으로 오체투지 행진을 하고 있다. 지난 9월에 이어 두 번째다. 이들은 “비용절감을 목적으로 한 승무업무 외주화 문제를 바로잡고 승무원을 직접고용해 승객 안전을 제대로 책임질 수 있도록 해 달라”며 문재인 대통령이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KTX 승무원 문제를 전향적으
해거름, 어린이집 향해 뛰다 걷다 경보하느라 아빠는 숨 가쁘다. 발이 꼬인다. 언 땅을 밟고 허둥댄다. 돌아온 슈퍼맨은 하원 시간 맞추느라 쩔쩔맨다. 슈퍼 가자고 징징대는 아이와 씨름하느라 길에서 떤다. 눈에서 레이저를 쏜다. 아빠 왔다 소리가 제일 반가웠을 아이한테 못할 말을 하고 만다. 코로 먹는지 눈으로 먹는지 저녁밥을 때우니 잘 시간이다. 놀겠다고
원조 롱패딩돌고 도는 게 유행이다. 알 수 없는 게 또 유행이다. 요즘 멋 좀 안다는 사람들이 즐겨 입는 롱패딩이 그렇다. 코치들이 길에 넘친다. 동계올림픽 개최국의 위엄이다. 걸을 수 있는 동계 산악용 침낭이다. 산악지형이 7할 이상인 나라의 흔한 거리 풍경이다. 한 번 입으면 벗을 수 없다니, 사람들은 겨울 시즌 마감 할인을 기다려 막차에 오른다. 과연 추위를 나기에 그만한 게 없어 겨울 농성 나선 해고자들은 진작부터 롱패딩을 챙겨 입었다. 여기가 원조 집 중 하나다. 좀 낫다뿐이지, 실은 한파 경보에 얼어 죽지 않을 만큼이었다
잎 다 떨군 나뭇가지에 바람 들면 바싹 말라 오그라든 잎새 몇 개가 겨우 매달려 볼품없이 떤다. 언제 가을이 오긴 했냐고 사람들은 흐린 기억을 믿지 못해 사시나무 떨듯 흔들린다. 빌딩 숲 바람길에 선다. 겨울, 나무는 지푸라기 옷을 두른다. 잠복소다. 겨우내 추위를 피해 숨어든 벌레를 잡을 덫이다. 노조에 든 사람들이 잔뜩 껴입고 그 위에 조끼를 걸친다.
집 짓는 현장에서 미장일했던 아버지는 겨울이면 집에서 소일하며 지냈다. 일감이 없다고, 추운 날엔 시멘트가 잘 굳지 않아서라고 얼핏 들었다. 손 굳을까 걱정 많던 당신은 쉬질 않고 이것저것 만들고 집구석을 고치느라 바빴다. 노느라 종일 밖에서 바빴던 내가 손 빨간 채 돌아오면 아버지는 석유곤로 심지 통을 슬쩍 들어 불을 올렸다. 둘러앉아 손을 녹였다. 석유
여기저기 또 삐죽, 가시처럼 솟았다. 금세 바람 차고 밤이 길다. 가시밭길이다. 잔뜩 껴입은 사람들이 그 아래 비닐 치고 머문다. 자주 목 꺾어 안부를 살핀다. 엄마 손 잡고 찾은 아이가 먼발치 아빠와 수인사를 나눈다. 전화 소리엔 된바람이 섞여 웅웅거린다. 노동기본권 쟁취며 법 개정 요구 담은 현수막이 내내 운다. 외줄 타고 밥이 오른다. 똥이 내려온다. 에어매트 바람 넣는 송풍기가 밤낮없이 돈다. 농성장은 국회와 가까워 눈엣가시다. 계산기 소리가 요란스러워 해결이 아직 멀었다. 해가 짧았다. 농성이 하루 또 무심코 길었다. 노랗
이른 추위 찾은 날, 마석 모란공원 전태일 상 앞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과 다짐과 함께 부른 노래를 이제는 저 멀리 각자의 일터 앉은 자리에서 라이브로 보고 듣는다. 세상 빠르게 변했다. 임금 떼이고, 괴롭힘당하고, 성희롱당해 어디 가서 말하기도 조심스러웠던 얘기를 이제는 온라인 단체 대화방에서 실시간으로 주고받는다. 밤 근무 예외 없던 임신부는 직장 체육대
이 가을, 붉은 것은 단풍이고, 노란 것은 은행이라 풍경은 누구나의 시선을 붙들어 위안을 건넨다. 잿빛 도심을 알록달록 물들인다. 스마트폰 사진첩에 빼곡 담긴다. 이 계절, 길 따라 붉고 또 노란 것이 노조 깃발이다. 선전 팻말이고, 이마 위 머리띠다. 비닐 집 낮은 문을 꾸부정 나선 사람들이 오늘의 행진을 준비한다. "300점 도로 진입"을 알리는 경찰
검은 옷차림 야당 의원들이 온갖 음모와 미심쩍은 행적을 밝히라며 현수막 들고 벌떡 일어나 시위를 했다. 초유의 일이었다. 낯선 풍경에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 시정연설을 마친 대통령이 시위대에 다가가 손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박수를 받았다. 사람 중심 경제로의 패러다임 전환 등 국정 구상을 밝힌 뒤였다. "국가가 자신의 역할을 다할 때 국민은 희망을 놓
광장에 치솟던 물줄기가 잠시 숨을 고른다. 소풍 나온 아이들이 물길을 가른다. 첨벙첨벙 발 딛는 소리마다 찰랑찰랑 긴 머리가 나풀거린다. 여기저기 노랗게 물들어 도심은 바짝 가을이다. 티 없이 짙푸른 하늘 아래 볕 닿는 것마다 반짝이는 철이다. 재잘재잘 수다가 끝이 없다. 웃느라 숨넘어간다. 쪼르르 서서 단체사진을 남기느라 온갖 폼을 잡는데, 그게 또 재밌다고 뒤로 넘어간다. 뛰고 뒤따르고 소리치고 웃는 아이들 품어 광장이 언젠가처럼 활기차다. 숙제 걱정, 시험 스트레스 잠시 내려둔 아이들이 가을볕에 여물어 간다. 미처 숙제를 끝내
비 예보에 우산을 챙겼는데 종일 짐이다. 술 한 잔 먹고 잃어버리기 일쑤다. 가볍고 이쁜 데다 버튼만 누르면 착 펴지고, 탁 접히는 기특한 것이었다. 설마 하고 나선 날엔 어김없이 비가 쏟아진다. 사무실 구석 주인 없는 우산을 찾아보는데, 그 흔해 빠진 게 마침 없다. 편의점 들러 제일 싼 우산 찾는데 속이 쓰리다. 살이 삐죽 나간 찢어진 우산을 뒤늦게 발견한다. 울상을 짓는다. 신발장 한구석에 우산이 쌓여 간다. 우산 사는 게 제일 아깝다는 잔소리에 대꾸하다 보니 저녁 식탁 국이 식는다. 설레었던 한때, 연인은 한 우산 아래에서
직접고용이 해답인가? 토론회 제목 끝엔 물음표가 붙었다. 불법은 맞지만, 악법 탓이니 법을 바꾸자고 자리 만든 보수야당 의원이 말했다. 협력업체 대표 하소연이 길었다. 토론회가 시간을 넘겼다. 직접고용이 답이라고, 앞선 토론회 끝나길 기다리던 KTX 해고승무원이 '몸자보'에 새겼다. 법 앞에 끝내 절망했던 해고승무원들이 다시 싸움에 나서며 만들었다. "다시
엎어지기야 어려운 일도 아니었던지 철퍼덕 땅에 잘도 붙었다. 일어나는 게 문제였다. 서울역에 가까워서다. 광화문에서 거기 멀지도 않은 곳이라지만 기어가려니 다르다. 꾸역꾸역 자벌레 기듯 나아가는데, 일어서는 동작이 흐트러진다. 무릎 짚고 종종 휘청거렸다. 얼굴 차차 붉었고, 흐트러진 머리칼이 뺨에 붙었다. 숨이 가빴다. 과연 그것은 고행이었다. 몸으로 말하
엄마는 회사 갔냐고, 아침에 눈 뜨자마자 아이가 물었다. 아빠도 회사 가야 한다고, 이러다 늦겠다고 채근하던 내게 또 물었다. 왜 매일 회사에 가야 해? 한참을 망설였다. 밥벌이해야지. 지금 먹는 사과와 우유와 시리얼이며 네가 이따 분명히 사 먹을 쭈쭈바 살 돈을 벌어야 한다고 구구절절 말하느라 입이 아팠다. 이것 말고 그럴듯한 게 더 없던가 싶어 마음도
사흘 남짓 가이 라이더 국제노동기구 사무총장의 '사생팬' 노릇을 했다. 주요 일정에 따라붙었다. 많은 사진을 찍었는데, 핵심을 짚은 좋은 사진이 몇 장이나 남았는지 모르겠다. 갈 길이 멀다. 권영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옛 사진 속 인물을 가리켰다. 1997년 '노동법 날치기' 철회 총파업 때, 국제노동계 대표단 일원으로 한국을 찾았던 사무총장이었다. 인연
언젠가 아버지가 오디오 시스템을 사 오셨다. 카세트 데크가 두 개였고, 층층이 뭐가 많아 크고 높았다. 덩치 큰 스피커 위엔 고음을 보강하는 작은 스피커가 따로 달린 최신의 것이라고 아버지는 설명했다. 당시 집마다 오디오 들이는 게 유행이었는데, 늦었지만 친구들에게 할 말이 생겨 기뻤다. 만질 수는 없어 슬펐다. 집에 혼자였던 날 몰래 이것저것 만지다 그만
주인 잃은 리본 두 개가 세종로 젖은 바닥에서 물기 머금은 채 나란했다. 쇠줄 하나가 둘을 엮었다. 노란색과 주황색이 달랐을 뿐 모양이 똑 닮았다. 잊지 말자고, 거기 새긴 의미도 한가지다. 2017년 3월31일 스텔라데이지호가 먼바다에서 침몰했다. 22명이 실종됐다. 한국인 선원은 8명이다. 16인승 구명 뗏목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거기 선원이 생존해
지나던 아이가 저게 꽹과리냐고 물었고 엄마가 징이라고 답했다. 하이디스가 뭐냐고 버스 기다리던 학생이 물었고 나도 모른다고 친구가 답했다. 뒤에 적은 먹튀를 알아보고 몇 마디를 보탰다. 먹구름이 짙었다. 곧 비가 내렸다. 우산 없는 사람들이 잰걸음으로 지나갔다. 흰옷 입은 해고자들이 줄지어 세 걸음을 걸었다. 징 소리 울렸고 바짝 엎드렸다. 징 소리에 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