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어쩌다 새 신발을 갖게 되면, 한동안 뒤뚱거리며 다녔다. 구겨지는 게 안타까워서다. 언젠가는 혼자 시장에 갔다가 으슥한 골목길에서 빨간 벽돌 들고 위협하던 불량배들에게 신발을 뺏기고 말았다. 맨발로 돌아오는 길의 감촉이 지금껏 생생하다. 엄마 품에 안겨서야 참았던 울음이 터졌다. 한겨울 신문배달 알바를 했다. 자전거 끌고 새벽길을 달려 한 달
행진하는 사람들 목적지가 저 앞인데, 빈틈없는 차벽이 진작에 높아 꽉 막혔다. 아우성이 따라 높았다. 일반도로교통방해는 그 죄가 어찌나 중한 것이었던지, 현행범 체포하라는 지휘관의 명령이 추상같았다. 뒷줄에 늘어선 채증 카메라가 일제히 사선으로 뻗었다. 거기 파란색 깃발보다 많았다. 노조 회계장부 훑듯, 사각 없이 그곳 온갖 사소한 몸짓과 표정까지를
언젠가 학교 건물 1층 복도엔 페인트 시너 냄새가 진동했다. 낡고 무거운 소파 양쪽에 벌려 두고 청테이프 부욱 뜯어 흰 천 팽팽하게 고정한 뒤, 그 위로 붓 놀려 글을 새겼다. 군더더기 없는 손놀림이 빠르고 유려했다. 주로 무언가를 규탄하거나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대개 힘찬 기운을 가진 글씨체는 교정 곳곳의 분위기를 한동안 좌우했다. 종종 동글동글 귀
저들은 곧 바닥을 박박 기어 먼 길 행진할 것이니, 오만상 찌푸릴 일이 남았는데, 웃는다. 싸움이 어느새 짧지 않은데, 갈 길이 아직 멀다. 그러나 저들 사이가 더없이 가까워 웃을 일이 있다. 동료 목에 작은 목도리를 둘러 주는 마음이 오체투지 앞둔 긴장감을 녹인다. 봄기운 슬쩍 깃든 그 길에 실은 저것도 곧 더워 번거로워질 것이지만, 그 손길에 한줌
자식 앞세운 엄마가, 동료 먼저 보낸 노동조 활동가가, 또 온갖 차별에 설움 복받친 비정규 노동자가 울고 더 울었다. 법원 앞에서, 분향소 옆에서, 어느 번듯한 원청 본사 앞길에서 꺽꺽 울음 먹고 버텼다. 하지만 터져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어 눈물이 곧 영정 위로, 바닥으로 흘렀다. 금세 옆 사람 눈이 따라 붉었다. 같이 울었다. 설렁거리던 사진기자가 바닥을 기며 잠시 바빴다. 애써 태연한 척을 하느라 눈에 힘을 주곤 했다. 웃을 일이 많지 않았지만 웃음이 없지도 않았다. 연대하러 먼 길 달려온 사람의 손을 잡고, 옷깃 여며 주
법원은 끝내 참담한 죽음의 책임을 원청에 묻지 않았다. 용균이 엄마가 주저앉아 소리쳤다. 울었다. 곧 눈물 닦고 입술을 꽉 물었다. 언제나처럼 전화기에 적어 둔 글을 기자들 앞에서 읽었다. 미리 준비해 둔 것이었다. 쉬운 말로 어려운 얘기를 익숙하게 풀어냈다. 종종 고개 들어 카메라 바라보는 눈에 물 고여 붉었다. 아들의 5주기, 엄마는 법 앞에 울었
아직은 검은 머리 엄마가 흰머리 엄마 옆에 살갑게 붙어 웃는다. 그 주름 많은 얼굴 살피며 때때로 찡그린다. 두꺼운 검은색 겨울 점퍼 차림 두 사람이 천막을 드나든다. 거기 얼굴 없는 검은색 영정이 줄줄이 걸려 있다. 향내 짙어, 분향소다. 흰머리 엄마가 그 앞에서 분주하다. 검은색 영정을 세우고 흰색 국화를 붙인다. 검은 머리 엄마가 먼저 보낸 아들의 5주기 추모 기간을 선포하는 자리를 흰머리 엄마가 꾸민다. 일하다 죽지 않게, 그 당연한 말을 하느라 사람들이 팔 들고 벌을 선다. 내 아들을 살려 내라, 그 가망 없는 말을 외치느
한 마을 사는 아이 친구 엄마가 자전거를 처음 배운다기에 여러 사람이 모였다. 50년 만의 첫 두 바퀴라니. 이게 될지 싶은 걱정도 있었지만, 응원의 목소리가 더 컸다. 어쩌다 성공이라도 한다면 마을잔치를 벌일 기세였다. 가족끼리는 운전 가르치는 거 아니라는 선지자 가르침 따라 옆집 아빠가 나섰다. 이론교육은 잠시, 실전 훈련이 혹독했다. 갸우뚱거리는
한낮 더위가 가실 줄을 몰라, 올 여름은 징글징글 길기도 하지. 별일도 없이 땀만 죽죽 흘린다. 집 밖은 위험하니 모니터 속 사진 몇 장과, 작아서 보이지도 않는 글자를 노려보며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거북목이 따라 늘어났다. 갑작스러운 굉음에 놀라 창을 열고 하늘을 보니 시퍼런 하늘이 부쩍 높다. 거기 비행기가 남기고 간 태극 문양 연기가 또렷했다. 땅만 보며 걷던 노인이,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던 여중생 무리가, 아기만 내려다보던 엄마도 다 같이 하늘 보고 탄성을 지른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그 문양이 새삼 달리 보이는 시절이다. 얼
집 옥상 화단에 장미 덩굴이 사방으로 뻗쳐 커가는데, 어찌 된 일인지 여름 다 가도록 빨간 꽃 피울 기미가 보이질 않아 이상하다고 여겼다. 사람 다니는 길로 무심코 자란 가지들을 쳐내느라 땡볕에 땀 흘렸다. 잔가지를 치우다 그만 가시에 찔렸다. 피 흘렸다. 서울고등법원 정원에 자란 장미 나무에는 그래도 꽃이 달렸다. 크기도 색깔도 영 시원찮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국가손배 파기환송심 선고를 받고 나온 쌍용차 노동자들 표정을 보면서도 그랬다. 낯빛이 어두웠다. 비 한 방울 끝내 야박했던 그해 여름, 하늘에선 비 대신 최루액이 쏟아지
무사고 사이에 사고가 끼었다. 한 글자 작은 차이에 사고가 있다. 빵 만드는 공장 반죽기에 끼어 노동자가 죽었다. 처음도 아니다. 밥벌이 나선 사람이 퇴근하지 못해 그날 저녁 밥상에 국이 싸늘하게 식는다. 갓 지은 고봉밥 오른 제사상을 받는다. 향냄새 짙다. 그 공장엔 무사고와 안전예방 구호 새긴 형광 조끼가 많고, 안전보건경영시스템 인증 팻말도 있고, 재해 예방을 위한 두툼한 지침서도 있을 테다. 대체 무엇이 없어 한 글자 작은 차이 사고를 불렀는지 보려고 찾아간 국회의원들을 막아선 배짱이 또한 두둑했다. 정문 앞 위생모자 쓴 사
땀에 전 티셔츠와 장마철 습기 머금고 꿉꿉했던 이불이 땡볕 아래 잘도 마른다. 바람 타고 바스락거린다. 힘든 시절의 작은 위안이다. 지글지글 뜨거워 원망스럽던 한낮의 볕이 이렇게 반가울 때도 있는 법이다. 먹고 돌아서면 설거지가 한가득이고, 입고 돌아보면 빨래통이 꽉 차 있다며 혀를 차던 늙은 엄마 얘기를 이제는 잘 알게 됐다. 집안일은 과연 끝이 없다. 숨이 턱턱 막혀 오는 이 더위엔 그래도 끝이 있을 테니 벌게진 얼굴로 헐떡거리며 버티게 된다. 살다 살다 이런 더위는 처음이라는 딸아이 얘기에 잠시 웃게 된다. 함께 길에 나섰다가
사람의 목소리는 종종 멀리 나아가질 못해 가슴에 녹슨 못으로 남는다. 쿡쿡 찔린 상처가 곪아 간다. 억울함과 분노를 품은 말들이 더욱 그렇다. 확성기가 필요한 이유다. 기자회견이, 1인 시위가, 집회와 파업 같은 단체행동이 모두 크게 말하기다. 그도 부족해 사람들은 굶고, 노숙하고, 바닥을 기는 행동으로 확성한다. 망루를 쌓아 높이 올라 농성하고서야 비로소 목소리가 높았다. 사람이 모였다. 단신 기사가 인터넷에 돌았다. 제 몸에 불을 놓고서야 유서로 남긴 말이 정치권 힘 있는 사람들 담벼락을 넘었다. 참담한 마음에 주먹 꼭 쥔 사람
웃지도, 그렇다고 울 수도 없는 상황을 한 장의 사진에 담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나는 오늘도 실패한다. 법정 앞을 기웃거리던 사진기자는 회전문 나오는 사람들 표정을 읽느라 긴장한다. 굳게 다문 입을, 옆자리 선 사람 눈매를 살핀다. 일찍 들이닥친 노안 탓인가, 보이질 않는다. 눈치껏 찍는 수밖에. 웃음이 얼마간 번지는 걸 본 누군가, 만세 포즈 요청을 했는데 화이팅에 그쳤다. 손잡고 활동가 윤지선의 통화내용을 얼핏 듣고 나서야 분위기를 파악했는데, 어라, 마냥 웃는 사람이 거기 없었다. 파기환송은 기꺼이 반길 만 한 일이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건설노조 사무실 앞에서 ‘뻗치기’하던 기자와, 교대를 기다리던 경찰이 땡볕을 피해 감나무 그늘 아래에 앉고 섰다. 어어, 저기! 누군가 외쳤고 깜박 졸던 오디오맨이 화들짝 놀라 카메라 옆으로 달렸다. 허공에 새똥이 날렸다. 미처 피하지 못한 기자가 물티슈를 찾았다. 사람들 웅성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깃털도 나지 않은 어린 새 한 마리가 2층 옥상 끄트머리에 위태롭게 매달렸다. 곧 떨어졌다. 날개를 두어 번 휘저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툭, 바닥에서 아직 죽지 않은 어린 새가 몇 번 고개 들어 움직였다. 옆자리
깃발 올려 행진하는 사람들이 사선에 섰다. 용산 방향이다. 사선은 힘이 세다고, 시선을 잡아끄는 힘이 있다고 사진 책에서 배운다. 버릇처럼 써먹는다. 언젠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청년의 이야기도 어떤 책에서 배웠다. 눈을 뗄 수 없었다. 하지만 먼 얘기였다. 노조 탄압에 항의해 분신한 사람의 이야기는 오늘 길에서 듣는다. 땡볕 아래 시커멓게 탄 사람들이 눈 붉혀가며 곱씹는 그이의 유언을 듣는다. 사실 저들 밥벌이 나선 일터가 사선이다. 죽고 다치는 일이 건설 현장에 흔했다. 온갖 불법과 탈법이 또한 많았다. 그것 바
맛있다는 동네 고기국수집에 저녁 먹으러 가는 길. 어딜 그냥 가는 법이 없어 아이들은 열 걸음마다 멈춰 논다. 쭈그려 앉아 뭔가를 줍는데, 눈 침침한 내가 보기에 딱 쓰레기다. 눈 밝은 녀석들이 감꽃이라며 반긴다. 실에 꿰어 목걸이 만들면 예쁘단다. 가까이 보니 과연 그렇다. 갈 길 바빠 독촉하던 아빠도 두어 개 주워 주머니에 담았다. 문득 평화로웠다. 생일 즈음인 저들이 예쁜 것을 많이 보고, 맛있는 것을 먹고, 어디서든 안전하기를 나는 바랐다. 일하느라 컴퓨터 화면에 띄워둔 사진을 보면서 저게 무엇이냐고 아이가 자주 묻는다. 설
돼지저금통 배를 갈랐다. 오래 먹인 것이었다. 와르르 쏟아진 은빛 동전이 적지 않아 주말 아침 빈속인데도 배가 불렀다. 꽁돈일리 없지만 횡재를 한 기분이다. 오래전 까짓거 시험 좀 못 봤다고 형한테 불려가 혼이 난 나는 분을 참지 못하고 반지하방 방충망을 뜯고 가출했다. 집 구석에 있던 빨간 저금통 하나를 들고 나섰는데, 묵직한 것이 참 든든했다. 친구 집에 자리 잡고 배를 갈라 쏟아 보니 갈색빛 십원짜리만 가득했다. 오백원쯤 탑을 쌓았을까, 문이 벌컥 열리며 아버지와 형이 나타났다. 가출은 하룻밤을 채 넘기지 못하고 미수에 그쳤다
제133주년 세계노동절을 맞아 1일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각각 여의도와 광화문 일대에서 노동자대회를 열고 윤석열 정부의 노동개악과 민생파탄을 규탄했다. 사진으로 담았다.
내년도 적용 최저임금 심의를 위한 최저임금위원회 1차 전원회의장. 사람 들지 않은 빈자리에 필기구와 명패, 그리고 흰 커피잔이 가지런했다. 주인 없는 의사봉과 명패 따위를 엮어 ‘파행’ 그림을 담으려는 사진기자의 뻗은 손이, 마실 사람 없는 빈 잔에 커피를 따르는 그곳 직원의 손이, 또 빨간 불 들어오지 않는 마이크가 사선 따라 가지런했다. 저마다의 할 일을 하느라 파행 속에도 질서는 있었다. 회의 진행이라는 위원장의 할 일을 하라며 노동조합 관계자들이 촉구했다. 관계자 말고는 나가 달라는 최저임금위 실무진의 안내 말에 내가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