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진하는 사람들 목적지가 저 앞인데, 빈틈없는 차벽이 진작에 높아 꽉 막혔다. 아우성이 따라 높았다. 일반도로교통방해는 그 죄가 어찌나 중한 것이었던지, 현행범 체포하라는 지휘관의 명령이 추상같았다. 뒷줄에 늘어선 채증 카메라가 일제히 사선으로 뻗었다. 거기 파란색 깃발보다 많았다. 노조 회계장부 훑듯, 사각 없이 그곳 온갖 사소한 몸짓과 표정까지를
언젠가 학교 건물 1층 복도엔 페인트 시너 냄새가 진동했다. 낡고 무거운 소파 양쪽에 벌려 두고 청테이프 부욱 뜯어 흰 천 팽팽하게 고정한 뒤, 그 위로 붓 놀려 글을 새겼다. 군더더기 없는 손놀림이 빠르고 유려했다. 주로 무언가를 규탄하거나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대개 힘찬 기운을 가진 글씨체는 교정 곳곳의 분위기를 한동안 좌우했다. 종종 동글동글 귀
저들은 곧 바닥을 박박 기어 먼 길 행진할 것이니, 오만상 찌푸릴 일이 남았는데, 웃는다. 싸움이 어느새 짧지 않은데, 갈 길이 아직 멀다. 그러나 저들 사이가 더없이 가까워 웃을 일이 있다. 동료 목에 작은 목도리를 둘러 주는 마음이 오체투지 앞둔 긴장감을 녹인다. 봄기운 슬쩍 깃든 그 길에 실은 저것도 곧 더워 번거로워질 것이지만, 그 손길에 한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밖에 떠돌 일 많은 나는 방수 신발을 사랑한다. 어릴 적부터 ‘메이커’를 동경했던 나는 그중에서도 무슨 텍스라는 이름의 기능성 소재라면 껌벅 넘어간다.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든든한 것이다. 그러니 신발장이 터져 나간다. 통장이 텅 비어간다. 언젠가 멀리 사는 늙은 엄마 아빠에게도 꼭 필요할 것 같아 사 드리려는데, 극구 싫다 하신
스피커 고장은 왜 이리 잦은지, 꼭 약속한 시각 10분을 앞두고 말썽이다. 그중 컴퓨터 전기 전자에 능통하다 인정받는 능력자가 나서도 소용없더라. 스피커와 마이크를 괜히 한 번 두들겨 본다. 전원을 껐다 켜 본다. 어색한 시간을 메우려 조끼 입은 사람들은 구호를 외치고 또 외쳐 본다. 여럿이 함께라 그 목소리 크기도 스피커 음량에 못지않지만, 구구절절
한때 엄마 품에서 꼬물거리던 작은 아이는 기어코 훌쩍 자라 엄마 정수리를 내려다본다. 촘촘했던 그 곳이 휑하니 비었을 때, 흰머리 가리기가 버거워질 때, 비로소 아이는 어른이 된다. 몸 조심해라, 잘 챙겨먹어야 한다, 크는 내내 들었던 온갖 잔소리를 하루 또 부쩍 작은 엄마에게 돌려준다. 이에 질세라 늙어 작은 엄마는 눈이 오면, 날이 춥거든 전화해
언젠가 방송 일 하는 노동자가 눈 많이 오던 날 밖에서 카메라 돌기를 기다리느라 눈사람이 됐던 일이 화제가 됐다. 마트 일 하는 노동자가 눈 쏟아지던 날, 부당한 정책을 규탄하느라 눈사람이 되는 일은 좀처럼 화제가 되질 않는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다. 꼼짝않고 서야 했던 사람들은 젖은 바닥에 앉지 않았던 걸 다행으로 여겼다. 언제나처럼 할 말이 많
법원은 끝내 참담한 죽음의 책임을 원청에 묻지 않았다. 용균이 엄마가 주저앉아 소리쳤다. 울었다. 곧 눈물 닦고 입술을 꽉 물었다. 언제나처럼 전화기에 적어 둔 글을 기자들 앞에서 읽었다. 미리 준비해 둔 것이었다. 쉬운 말로 어려운 얘기를 익숙하게 풀어냈다. 종종 고개 들어 카메라 바라보는 눈에 물 고여 붉었다. 아들의 5주기, 엄마는 법 앞에 울었
규탄하고 촉구할 것이 많아 길에 나선 사람들 구호 따라 입김이 뽀얗다. 맞춰 입기라도 한 것인지 검은색, 또 길고 두터운 패딩점퍼 차림 사람들이 팻말 든 손가락을 파고드는 한기를 어쩌지 못해 자꾸 꼼지락거린다. 그 중 누군가 곡기 끊고 말라가는 사람도 있어 추운 티를 내지 못한다. 동료가 건넨 핫팩을 만지작거리며 발을 동동 구른다. 철 따라 바람 따라 낙엽 구른다.길에 나서 말하기 고된 철이다. 설 곳 좁아 더욱 그렇다. 한때 울긋불긋 농성 천막 줄줄이 많았던 고용노동청 앞자리에, 또 기자회견 줄을 선 대통령실 앞에 질서유지선이 길
아직은 검은 머리 엄마가 흰머리 엄마 옆에 살갑게 붙어 웃는다. 그 주름 많은 얼굴 살피며 때때로 찡그린다. 두꺼운 검은색 겨울 점퍼 차림 두 사람이 천막을 드나든다. 거기 얼굴 없는 검은색 영정이 줄줄이 걸려 있다. 향내 짙어, 분향소다. 흰머리 엄마가 그 앞에서 분주하다. 검은색 영정을 세우고 흰색 국화를 붙인다. 검은 머리 엄마가 먼저 보낸 아들의 5주기 추모 기간을 선포하는 자리를 흰머리 엄마가 꾸민다. 일하다 죽지 않게, 그 당연한 말을 하느라 사람들이 팔 들고 벌을 선다. 내 아들을 살려 내라, 그 가망 없는 말을 외치느
아직은 노란 머리숱 많은 나무 위로 눈이 내렸다. 두툼한 옷 입은 사람들이 휑한 목을 가리려 움츠린 채 종종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넌다. 빌딩 숲 사잇길 된바람에 후두둑 바짝 마른 잎 떨구니 길바닥엔 낙엽이 쌓이고 구른다. 겨울이다. 노란 잎 쌓인 거기 바닥엔 또 사람들이 앉아 버틴다. 개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을 어서
노랗게 물든 가을 위로 사람이 조르륵 앉아 일한다. 옛 궁궐 추녀마루 끝자락에 붙은 어처구니를 닮았다. 귀신을 쫓기 위해 올린 것이라는데, 이제는 거기 CCTV가 그 비슷한 노릇을 한다. 잘 보이라고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는 건 여전히 사람 몫이다. 어처구니없다는 말이 흔히 쓰인다. 너무 뜻밖이어서 기가 막히는 상황을 이른다. 국정감사 한창이었던 저
안전고리도, 안전모도, 안전교육도 없이 일용직 하청노동자가 툭, 떨어졌다. 먼 길 떠났다. 이해할 수도,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어 먼 길 나선 늙은 엄마 눈물이 툭, 아들 영정 위로 흐른다. 내 아들을 살려내요, 내 아들을.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이 엄마의 가슴은 찢어지도록 아픕니다.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비세요. 빌어야 합니다. 영정 끌어안고 엄
한 마을 사는 아이 친구 엄마가 자전거를 처음 배운다기에 여러 사람이 모였다. 50년 만의 첫 두 바퀴라니. 이게 될지 싶은 걱정도 있었지만, 응원의 목소리가 더 컸다. 어쩌다 성공이라도 한다면 마을잔치를 벌일 기세였다. 가족끼리는 운전 가르치는 거 아니라는 선지자 가르침 따라 옆집 아빠가 나섰다. 이론교육은 잠시, 실전 훈련이 혹독했다. 갸우뚱거리는
한낮 더위가 가실 줄을 몰라, 올 여름은 징글징글 길기도 하지. 별일도 없이 땀만 죽죽 흘린다. 집 밖은 위험하니 모니터 속 사진 몇 장과, 작아서 보이지도 않는 글자를 노려보며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거북목이 따라 늘어났다. 갑작스러운 굉음에 놀라 창을 열고 하늘을 보니 시퍼런 하늘이 부쩍 높다. 거기 비행기가 남기고 간 태극 문양 연기가 또렷했다. 땅만 보며 걷던 노인이,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던 여중생 무리가, 아기만 내려다보던 엄마도 다 같이 하늘 보고 탄성을 지른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그 문양이 새삼 달리 보이는 시절이다. 얼
집 옥상 화단에 장미 덩굴이 사방으로 뻗쳐 커가는데, 어찌 된 일인지 여름 다 가도록 빨간 꽃 피울 기미가 보이질 않아 이상하다고 여겼다. 사람 다니는 길로 무심코 자란 가지들을 쳐내느라 땡볕에 땀 흘렸다. 잔가지를 치우다 그만 가시에 찔렸다. 피 흘렸다. 서울고등법원 정원에 자란 장미 나무에는 그래도 꽃이 달렸다. 크기도 색깔도 영 시원찮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국가손배 파기환송심 선고를 받고 나온 쌍용차 노동자들 표정을 보면서도 그랬다. 낯빛이 어두웠다. 비 한 방울 끝내 야박했던 그해 여름, 하늘에선 비 대신 최루액이 쏟아지
무사고 사이에 사고가 끼었다. 한 글자 작은 차이에 사고가 있다. 빵 만드는 공장 반죽기에 끼어 노동자가 죽었다. 처음도 아니다. 밥벌이 나선 사람이 퇴근하지 못해 그날 저녁 밥상에 국이 싸늘하게 식는다. 갓 지은 고봉밥 오른 제사상을 받는다. 향냄새 짙다. 그 공장엔 무사고와 안전예방 구호 새긴 형광 조끼가 많고, 안전보건경영시스템 인증 팻말도 있고, 재해 예방을 위한 두툼한 지침서도 있을 테다. 대체 무엇이 없어 한 글자 작은 차이 사고를 불렀는지 보려고 찾아간 국회의원들을 막아선 배짱이 또한 두둑했다. 정문 앞 위생모자 쓴 사
땀에 전 티셔츠와 장마철 습기 머금고 꿉꿉했던 이불이 땡볕 아래 잘도 마른다. 바람 타고 바스락거린다. 힘든 시절의 작은 위안이다. 지글지글 뜨거워 원망스럽던 한낮의 볕이 이렇게 반가울 때도 있는 법이다. 먹고 돌아서면 설거지가 한가득이고, 입고 돌아보면 빨래통이 꽉 차 있다며 혀를 차던 늙은 엄마 얘기를 이제는 잘 알게 됐다. 집안일은 과연 끝이 없다. 숨이 턱턱 막혀 오는 이 더위엔 그래도 끝이 있을 테니 벌게진 얼굴로 헐떡거리며 버티게 된다. 살다 살다 이런 더위는 처음이라는 딸아이 얘기에 잠시 웃게 된다. 함께 길에 나섰다가
파업 나선 병원 노동자들 옆으로 공사가 한창이다. 병원은 크고 번듯해지는데, 거기 일하는 사람들 처지는 그렇지 못하다고 단결투쟁 머리띠 두른 저들이 말했다. 사람에게 투자하라고 외쳤다. 안전제일, 저 유명한 구호는 무언가 짓고 부수는 터 어디든 붙어 익숙하지만, 실상 야속한 말에 그친다. 안전을 지운 자리에 돈이 붙어 비로소 참말이 된다는 게 사람들 쓰린 뒷말이다. 철근을 아끼고, 비 오는 날 콘크리트 타설하던 건물에서 보글보글, 저녁 밥상이 하루 또 무사하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겠다는 권력자와 정치인의 잦은 약속 또한 저
된더위 속 길에 나서 길을 찾는 사람들은 저마다 살길을 찾는다. 모자와 쿨토시, 얼음물이 흔한데 휴대용 선풍기도 빼놓을 수 없다. 손풍기라고 불린다. 저 작은 것은 제 얼굴과 목을 겨우 달랠 만큼의 바람이 나오는데, 그 시원함이란 아스팔트 위에서 땀 흘려본 사람은 잘 안다. 여름철 집회 필수품으로 꼽힌다. 손에 쥐어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어 목에 거는 형태의 것도 나오는데, 그 부담스러운 모양 탓에 대세를 이루지는 못한다. 구호 외치느라 올린 주먹들 속에서 종종 손풍기를 찾아볼 수 있다. 저기 쭉 뻗은 팔 끝에도 손풍기가 있다. 노조